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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해슬 Jul 19. 2021

쉿, 자나 깨나 말조심!

비밀은 없다


어려서 나는 조심성이 없던 아이었다. 천방지축 돌아다니며 무릎이 멍들고 다치기 일쑤였고, 때로는 생각 없이 말을 내뱉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반에서 활발히 노는 무리가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목소리 크고 말 많고, 모였을 때 시선을 끄는 무리였다. 영화 <써니>의 학창 시절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탐탁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제일 잘 나가'라며 즐겁게 노는 아이들일 뿐이었다.​


나는 그 무리를 참 부러워했다. 하지만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 탓에 무리가 노는 것을 바라만 보곤 했다. 그 친구들은 일명 센 캐릭터였지만, 그렇다고 일진은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 집에 가서 하룻밤 자거나 활발하게 놀았던 애들이었을 뿐이다.

소심하게 부러워만 하던 어느 날, 내게도 그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왔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우연히 말을 섞었고, 급기야 주말에 한 친구네 집에서 모여 자는데 초대되었다. 물론 우리 엄마는 ‘남의 집 가서 자고 오지 말고, 차라리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라.’였지만, 그즈음에 우리 집은 부모님이 자주 다투셔서 실상 친구들을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장소 제공자의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다니 그 집이 딱이었다.


당연히 그 집으로 가야지!


그 집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선, 생애 처음으로 외박을 했다. 수다 떨며 집 구경하기, 하룻밤 자고 오기. 진짜 별것 아닌 것을 그땐 왜 그리 간절히 하고 싶어서 몸부림쳤었을까. ​요새는 부모가 없는 집에서 자고 온다고 거짓말했다가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그렇게 친구 집에 갔었는데, 당혹스럽게 남자애들도 와 있었다. 그 남자애들은 우리 학교 애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남녀 수가 엇비슷해서 밤늦게까지 거실에서 같이 놀았다. 다만 밤에 그 집의 다른 방과 거실에서 남자애들도 같이 자고 일어났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누구의 배려인지는 몰라도 나는 집주인인 친구와 한 침대를 썼다. 당시에 내가 침대 아니면 못 잔다고 생콩하게 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일 없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서 다들 ‘안녕’하며 기분 좋게 헤어졌던 것 같은데, 얼마 뒤에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수업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한 여자애가 학교 운동장에서 날 부른 것이다.

“왜?”


나를 부른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 주변에는 여러 명의 애들이 있었다.


“야, 너 내 흉봤다며?”


“응? 내가? 나 그런 적 없는데.”


“웃기네. 애들이 다 말해줬어. 너 왜 남의 말을 막 하고 다녀?”


사납게 몰아치는 그 애의 말과 노려보는 눈빛, 게다가 뒤에 서 있는 애들 때문에 숨이 컥 막히면서 긴장하다 못해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아니야.. 나 그런 적 없어..”


제대로 목소리도 못 내고 기어가듯이 대답을 했다.


남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람?


“전에 ㅇㅇ이 집에서 자고 온 날에 같이 놀았던 남자애들이 말해줬어. 걔네들한테 내 얘기했다며? 왜 남 얘기를 하고 다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이게 무슨 소리지? 난 흉본 적 없는데.. 아차!


흉을 본 건 아니고, 그날 남자애들이랑 거실에서 얘기하면서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같다. 이 애는 그날 허락을 못 받아서 빠졌는데, 다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리에 없는 애들 이야기가 나왔고 거기에 나도 흥분해 말을 보탰던 것이다.

“진짜 재수 없어.”


그 아이 말에 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 나를 비웃는 소리가 들리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중에 또 얘기 함부로 해봐. 진짜 가만 안 둬.”


이 말이 얼마나 협박처럼 들리던지 무서워서 덜덜 떨며 미안하다고 계속 작은 소리로 되뇌었다.   


"이만 가봐!"


나는 얼른 집으로 뛰어왔고, 이후 더 이상 그 애들과 부딪친 일은 없었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오던 날, 그 집에 나만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사실 좀 억울했다. 입을 거치며 부풀어진 말이 그 아이 귀에까지 전해졌고, 결국 가장 친하지 않은 내가 뒤집어쓴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더는 어울리지 못하고 조용히 찌그러져서 생활을 했다. 보복성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나도 다른 친구들과 잘 지냈고, 그 무리는 그 무리대로 잘 지냈다.



그래도 이 일 때문에 말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오래 박혀있었다. 하지만 험담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겪은 걸 보면 시간이 흐르며 아마도 이 일 자체를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보면서 그 애의 사납던 모습과 날 비웃던 아이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날은 무섭고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가슴 쓰라린 교훈이지만 혹독하면서도 무탈하게 배웠다. 발길질이라도 한번 당했다면 얼마나 두려웠을까. 조심성이 없기도 했고 분위기 파악도 못했다. 어리숙한 나는 그런 기억들을 쌓으며 서서히 성장해왔다.


하지만 쉿, 말은 항상 조심하자! 날카롭게 되돌아올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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