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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해슬 Sep 03. 2021

우중산책

평온한 슬픔


하루에 30분 정도 산책을 하려고 노력한다. 오전에 아이들을 등원시킨 뒤, 뒤늦게 아침밥을 챙겨 먹고 소화를 시킬 겸 밖으로 나간다. 집 근처에 산책 코스가 있다. 매일 같은 풍경을 보는데도 질리지 않는다. 파란 하늘, 초록색 나뭇잎, 다가갈 수 없는 습지 속 바위 위에서 한가로이 쉬는 새, 근처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매번 눈에 홀리게 한다.


요 며칠은 가을장마로 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비가 내리지 않기에 나가서 걷다 보면 다시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어제도 혹시나 해서 우산을 들고나갔다가 역시나 도중에 우산을 펼치고 산책을 했다. 세찬 비였다면 운동화가 젖을 걸 걱정해서 들어갔겠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오히려 운치가 있다. ‘우중 산책’이라 이름을 붙이고 길을 따라 걸었다.




나뭇잎이나 풀잎에 물방울이 송송 맺힌 걸 보면서 걷노라니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중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어느 토요일 하교 시간에 갑자기 세찬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토요일에도 학교를 다녔다.) 그때에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고, 때마침 엄마도 일이 있으시다며 아침부터 나가셨던 것 같다. 그러니 엄마를 기다리지 않고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보통 비가 올 때 우산이 없으면 책가방을 머리에 올리고 열심히 집까지 뛰어가기 마련인데, 그날은 달랐다. 기억 속의 나는 반팔 교복을 입고 가방을 그대로 어깨에 맨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집 방향으로 함께 가는 친구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하굣길에 친구 없이 혼자 가야 하는 게 게 속상했는데, 그날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내 맘대로 내리를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어도 상관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여름이라 비가 그다지 차갑지 않았다. 머리가 젖어오고 안경이 비 때문에 물기가 어려 앞이 흐릿해졌다. 나는 안경을 벗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안경을 쓰지 않으니 앞은 똑같이 흐릿하지만 오히려 덜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게 보이지 않으니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교복 블라우스와 치마는 서서히 젖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 공간 속에 나만 있는 것 같았다. 고요하면서 하나로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굳이 뛰어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토요일이니까, 집에 가서 교복은 세탁기에 돌리면 되고, 젖은 몸은 깨끗하게 씻어 말린 후 새 옷을 꺼내 입은 뒤 뽀송뽀송한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면 되었다. 다음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이었기에 더 느긋하게 걸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의 기분은 어떠했던 걸까? 오래도록 그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2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씩 부슬비가 오는 날이든 세찬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이든 혼자 걷다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떤 기분으로 그 거리를 걸으며 집으로 돌아갔을까? 정말 고요하고 느긋하게 걸었던 걸까? 오래된 기억은 빛이 바래서 가끔 희석되기 마련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당시의 장면이 짧게 떠오르지만, 그때의 내 기분도 그렇게 차분했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던 건, 얼마 전에 읽기 시작한 책에서 어떤 단어를 봤기 때문이다. 책 속 주인공은 사람답게 살기 힘든 환경을 맞닥뜨리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짧은 대화를 하며 따스한 인간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는 인사를 하며 ‘평온한 슬픔을 느꼈다.’라고 한다.



‘평온한 슬픔’이라니, 평온하다와 슬픔이 같이 묶일 수 있는 단어였던가? 그러다가 내 기억 속 비 오는 날 걸었던 때를 떠올린 것이다. 내 기억은 어떻게 왜곡되어 있었을까? 그날 엄마는 어디로 가셨는지, 동생은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당시에는 비를 맞으며 기분이 좋았다고 여겼는데, 어쩌면 그때의 기분이 평온한 슬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까짓 것, 아무것도 아냐. 하면서 털어버릴 수 있는 가정환경이 아니었다. 엄마의 부재를 알면서도 묵묵히 견뎌내야 했다. 난 누나니까. 동생도 돌봐야 하니까. 가지 말라고 투정 부릴 수도 없는 때였고,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다. 괜찮아질 거라 다독여야만 했다. 그 빗속에서, 한참을 걸으며, 나에게 주문을 걸듯이.




여전히 가끔 비 오는 날 산책은 평온한 슬픔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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