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죽음의 바다 (★★★★★ Noryang: Deadly Sea)
명량이 처음 나온다고 했을 때 이순신의 영화를 찾아본 적이 있다. 어려서 흑백텔레비전에 달구지에 끌려가며 백의종군을 하던 영화가 어렴풋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박정희가 충무공 이순신을 기린다고는 했지만 정작 영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과거 오백 원 지폐와 백 원짜리 동전에 항상 익숙한 존재에 대한 영화가 왜 적을까? 토착왜구들의 음모인가?
김태훈의 '이순신의 두 얼굴'을 정말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난중일기를 읽다가 참 지루하다는 것과 일관성 있는 모습에 놀라거나 경악하게 된다. 동시에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감정과 호불호가 있음을 알게 된다. 사야가 김충선의 이야기인 '이순신의 반역'을 통해서 항왜장들을 알게 되고 음모론적이지만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다. 최근에 다시 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를 한 번 더 읽어 봤다. 2차 세계대전당시 일본의 제독들이 이순신을 학습하고 존경하는 것을 돌아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 한국에 존재한다. 전쟁사로 보면 육군은 칭기즈칸을 제외하면 광개토대왕 수준이면 2위를 노려볼만한 대단한 기록이고, 해전사로 보면 이순신은 다른 제독들과 급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더니 별봉이 왈 "군대 휴가 나온 친구가 군대에서 단체관람 했는데 개재미없다는데요"라고 초를 친다. 망할 녀석 말을 말아야지. 하여튼 찬바람에 콧물이 휘날릴 것처럼 춥지만 영화를 보러 갔다. 추워서 커피를 주문해서 들고 가다 보니 핫쵸코다. 서비스인가? 달달한 초콜릿 향을 즐기면 자리를 잡았다. 요즘은 영화 포스터도 경기 때문인지 잘 주지 않는다. 시간을 딱 맞춰서 얼른 자리를 잡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오호, 외계+인 2부를 한다. 기대된다. 노자적으로 또는 외계인 인터뷰적 때론 양자역학적으로 보고 있는데, 우리 집 달봉이는 산만한 영화라며 타박을 한다.
영화 시작 전에 절찬 상영 중이란 노량의 광고가 뜬다. 포스터 대용으로 한 컷을 찍었는데, 영화 끝나고 나니 포스터가 엄청나게 쌓여있다. 웬일이래?
영화 내내 이순신은 완고함을 보여준다. 진린의 온갖 설득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 너무 많은 원칙을 갖고 있다는 것은 원칙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융통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융통성이 너무 많으면 기회주의자처럼 간사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원칙은 최소한으로 갖고 있어야 빛난다.
문제는 이런 원칙을 갖은 사람과 원칙주의자(글자대로만 하는 또라이일 수 있다)는 다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떤 성과를 낸다. 너무 그 짓만 해서 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또 그렇기 때문에 탄압과 따돌림을 감내할 실력과 정신력이 필요할 수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가족에 대한 극진한 마음과 왜적을 섬멸할 두 가지 원칙이 선명하다. 가끔 원균을 씹어 돌리는 불만이 보이기는 하지만.. 난 그 두 가지 원칙이 맘에 든다.
세상을 살며 목숨을 걸어야 할 때는 가족을 위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는 싸움을 할 필요도 없고, 가진 것이 없는 놈들과도 싸울 필요가 없지만 지는 싸움을 하고, 가진 것이 없는 자들과도 싸워야 할 때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도 그 국가 안에 가족이 있기 때문 아닌가? 아무 일에 뭘 거는 놈은 그런 베짱이나 기개, 용기가 없는 주둥이 파이터일 가능성이 높다. 실전은 다르다.
또 한 가지 명량에서 의를 위한 싸움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의(義)란 무엇인가? 옳음이란 뜻에 가깝고, 옳다는 것은 하나로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이는 마음의 저울이 가장 정확하다. 불의는 이순신과 같이 섬멸해야 한다. 다시는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해야 한다. 전쟁과 다툼은 좋은 일이 아니라 피해야 한다. 다툼에 진입하는 것은 명분과 옳음이 명확해야 하고, 반드시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왜놈들이 자꾸 찝쩍거리는 역사가 대륙에서 건너가 자리 잡고 고향에 오고 싶은 마음일 수 있지만, 칼차고 망나니처럼 오는 것들은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박살을 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왜란을 막아낸 이순신을 바보 멍충이 같은 선조를 보면 안일한 대처가 불러오는 참사를 이해하게 된다. 한명기의 '광해군'이란 책을 보면 마음이 아주 답답해진다. 그렇게 고종에 와서는 이순신 같은 사람이 아니라 이완용 같은 놈들이 나와서 혼을 왜놈 것으로 바꾸는 신박한 짓을 한다. 그 이후로 아픈 기억과 혼이 우리 것이 아닌 종자들이 아직도 한반도에 존재하고, 조롱 섞인 말로 토착왜구란 말이 아직도 회자된다. 토착왜구가 전멸할 때까지 사라져서는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한다. 누구 편의 문제가 아니라 의(義)에 대한 소명의식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진린은 너무 때깔 좋게 잘 표현되었다. 사대주의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가장 분장이 어울리다고 해야 할까?
항왜장들이 명량, 한산, 노량을 통해서 부각된다. 의(義)라는 명분아래 괜찮은 일본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왜놈이지.
또 하나의 관심사는 누가 가장 이순신스러운가의 궁금증이다. 노량의 김윤석은 과도한 수염이 우리에게 익숙한 성웅 이순신의 초상, 백 원짜리 동전, 오백 원 지폐의 모습과 다르다. 사실 본 사람이 아무도 생존하지 않기에 이미지로 남아 있는 모습은 한산의 박해일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여러 책, 특히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최민식과 김윤석이 훨씬 정서적으로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기록을 보면 이순신이 히어로처럼 혼자 해결하는 모습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노량에서 보여준 캐릭터가 난중일기와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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