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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주말 길구나

삼식이들 손 많이 감

by khori

어제부터 마나님 장기 출타 중이시다. 식탁에 굶으면 안 된다고 레토르트를 잔뜩 쌓아두시고 출타 중이시다. 달봉이 별봉이 요청이 오면 배달 주문도 해주신다. 편리한 세상이긴 한데.


나도 귀찮아서 어제저녁엔 돈가스를 좀 사갈까 하다 그냥 집에 왔다. 대신 동네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있는 빵집에서 빵을 몇 개 샀다. 퇴근길 이 빵 냄새는 회사 근처 지하철 근처 만두집만큼 매혹적이다. 둘 다 맛이 좋다. 특히 만두 매니아적 입장에서 괜찮다. 요즘은 손만두 먹기가 좀 힘들긴 하다. 집에 도착하니 밥을 안 먹고 나만 본다 이런 잠재적 삼식이들. 라면은 좀 그렇지. 김치볶음밥을 한다고 하니, 별봉이는 손을 들고, 달봉이는 시큰둥하더니 조금만 거들겠다고 한다. 그러다 거의 밥을 5-6 공기는 볶은 듯하다. 누가 보면 굶기는 줄 알겠다. 설거지도 안 하는 것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주말이라고 한놈은 늦게까지 방에 게임방 차리고 놀고, 다른 놈은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닌다. 한놈은 야밤에 사다 놓은 빵을 먹고, 다른 놈은 새벽에 먹고.. 오늘은 주말이지만 난리 부르스 중인 문제 때문에 사무실에 갈 요량이었다. 밥 안 먹으면 일 안 하는 소신을 갖고 있음으로 뭘 먹긴 해야 한다. 밥에 날달걀을 풀어서 잘 으깨고, 프라이팬에 붙였다. 덤으로 스팸을 잘 구워서 붙여줬다. 스팸 깡통 사이즈면 딱 좋은데 그런 프라이팬은 없다. 겉은 누룽지 같은 느낌이 살짝 들고, 스팸덕에 간간하고.. 늦게 잔 녀석이 일어나서 프라이팬 하나는 더 먹은 듯.


사무실에 가서 자꾸 업체 트집을 잡는 PM 녀석에게 잔소리를 조금 했다. 눈치 없이 세계 초일류 기업 납품건이라 본사로서도 큰 레퍼런스인데 고객님 트집 잡아봐야 곡소리밖에 더 나는가? 할 수 없이, 사업의 중요성, 고객 상황의 중요성, 경쟁상황, 현재 상황의 핵심,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등등 무슨 마이클포터 경쟁론 토론도 아니고 잔소리를 했더니 적막강산이 흐른다. 담당 팀장한테 전화해서 이차저차 다시 설명하니 '삼촌 잘 이해했습니다. 오후까지 처리하겠습니다'한다. 다행히 저녁에 잘 마무리된 것 같다. 본사 입장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고, 지사 입장에서도 요즘같이 'All die but you first' 전략이 난무하는 시대엔 하나씩 해야 할 것을 차곡차곡 만들어가는 것이 저력이다. 미국 동생들에게도 안부를 전했더니 '여긴 2008년 분위기예요', '시장이 다 죽었어요 아휴'라며 걱정들이 땅이 꺼진다. 유럽은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전쟁 나고, 영국, 독일, 프랑스도 맛이 가고 그나마 지표상으로 스페인이 좋다. 5월에 가봐도 여긴 좀 활기가 느껴진다. 어제도 변덕쟁이 마이웨이 트선생 덕에 주가가 무슨 800포인트씩 나락 가고 아침에 환율 1430원을 보면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는데. 어쨌든 드라마 대사처럼 '살아보면 살게 된다'가 될지 살아내게 될지 함 보자고.


저녁은 귀찮아서 닭갈비를 사주겠다고 했다. 마침 후배 녀석도 연락 와서 같이 먹자고 했다. 다 큰 애들 용돈을 주고 에혀.. 달봉이 별봉이만 신났지. 별봉이는 탈이 났는지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데도 밥은 잘 먹는다. 신기해. 주방장이 바뀌었나 음식 맛이 변했다. 젊은 총각이 뭘 해주겠다고 해서, 내가 한다고 했더니 자기 일이라고 한다. 저쪽 일 보고 이건 알아서 한다고 했다. 괜찮은 맛집이었는데 당분간 근처에 안 갈 듯하다.


원 계획은 밥 먹고 마이크 스탠드가 있는 노래방 가자고 했는데 비도 오고 커피 가게에 갔다. 후배랑 만나면 자주 가는 곳인데 한 곳은 만석이고, 언제나 자리가 넉넉한 곳은 여유가 있다. 가게에 인테리어를 조금 하고 키오스크도 들여놨는데 여긴 모던, 심플하다. 그래도 탁자는 학교 책상 같더니 하얀색으로 다 바꿨다. 공돌이들 3명과 우리 애들도 내가 뭘 잘하는지 잘 모르는 나란 존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애들도 신기한가 보네.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왕년에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하루는 이 후배 녀석이 일이 아주 힘들었나 점심때 보자마자 "형님, 힘들어 죽을 거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도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던 시절이었다. 그거 마무리하고 사장이 훈장 받았다고..ㅡㅡ;;; 생각만 해도 내가.. 그때 내 대답이 "그래? 죽을 놈은 말없이 누워있다. 떠들 힘 있으면 하던 일 해라. 사람 잘 안 죽는다. 어이없게 죽긴 해도"라고 했던 것 같다. 그 후론 내가 '에휴 힘들다'라는 소리만 나와도 손뼉을 치면 '사람 잘 안 죽는다며!!'라고 쫓아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만화의 근원은 그놈의 입이지. 낭중지추 같은 녀석이라 여전하다. 나이도 들어가고 재주 많은 사람은 의외로 미움을 많이 받는다. 시기심이 기분을 나쁘게 하니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을 부리면 좋지. 그 밑에서 일하면 과로로 제명을 못살고'라는 말을 하게 된다. 제갈량이 왕이 못 되는 결정적 이유 아닐까 매번 생각하는 이유다. 사람은 합리적이지 않으니까?


노래방은 뒤로 하고 헤어져서 각자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저 녀석은 음주가무와 상관이 없으니 뭘 좀 해줄까? 좀 생각해 봐야지. 비가 많이 와서 택시를 타자며 별봉이가 자기가 부르겠다고 한다. 허허.. 비가 오니 택시 안 잡힌다. 그냥 큰 거 부르라고 했더니 겨우 잡았다. 벤티 기사가 여성분이라 신기하다. 러시아에서 여자 택시기사 보는 것만큼 신기하네.


내일은 뭐 먹지라고 물어봤더니 김치찌개가 먹고 싶단다. 쓱 보더니 그냥 '컵반 먹을까?'라고 한다. 야밤엔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다. 두부도 계란 풀어서 잘 붙여놨다. 시식을 해보더니 괜찮단다. 삼식이들 심사도 받아야 한다. 어려서부터 계란밥 만들면 이상한 눈빛으로 보다가 다 되면 내가 겨우 몇 숟가락 먹기도 힘들 때가 있었는데 성인이 돼도 변하는 게 없어. 누굴 탓해! 미역국도 끓여달라고 했으면 화냈을 거야. 대학시절 밥 해 먹는 게 재미있기고 하고 아주 골치 아픈 일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샌드위치(가장 편한건 바게스 속 뜯어서 그냥 재료 쌓는게 가장 빠름), 스파게티, 김치찌개(오만가지 맛이 나는 다양한 방법을 체득함), 탕수육, 잔치국수, 돈가스, 폭찹스테이크, 김치전까지 별로 안 해본 음식이 없다. 신혼 땐 김치도 담가주고. 그러다 직장생활이 바빠지고 음식 하는 걸 끊다시피 했는데, 자식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가끔 내가 끓이는 라면이 맛있다고 시킬 때가 좋았지. 마나님 출타 중이니 이 삼식이들 손이 많이 가네. 아침은 됐고, 점심 저녁은 굶길 수도 없고. 하여튼 달봉이 별봉이한테 내 마누라한테 고마워하고, 손 많이 안 가게 하라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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