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자마자 집으로 곧장 갈 수 있도록 평일 저녁 약속은 피하는 편이며, 주말 이틀 중 하루는 반드시 집에서 머무는 등 최대한 고양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게 바로 요가다.
빈야사(vinyasa) 요가를 접한 지는 5년 정도 되었고, 최근 2년 동안은 매주 수련하고 있다. 이렇게 쓰니 숙련된 요기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근력이 부족해서 빈야사 플로우의 기본 중 하나인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도 매번 낑낑 거리며 겨우 해내는 만년 초급자이며, 머리 서기 자세는 가장 낮은 난이도의 옵션으로도 도전 못하는 겁쟁이다. 무엇보다도 요가 선생님의 지도 없이는 매트 위에 혼자 서지 않는 게으름뱅이인지라 요기라고 자칭하기도 살짝 멋쩍다. 물론 집에서 요가를 하려고 하면 고양이가 슬그머니 매트를 차지하고 앉아버리는 바람에 요가원에서만 수련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가 있기는 하지만.
수영, 달리기, 필라테스 등 나름 이런저런 운동을 적지 않게, 꾸준히 해왔다고 자부하는데, 그중에서도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운동은 요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부위의 힘을 주면 휘청대던 몸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곧고 단단해진다. 사용하라고 한 근육에 고통이 느껴질 때면 내가 제대로 아사나(자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내 사지를 오롯이 내가 통제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강인해진다.
무엇보다도 요가의 좋은 점은 정해진 플로우를 반복하다 보면 생각이 사라지면서 정신이나 마음 같은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요소 외에 오롯이 내 몸만 남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호흡을 한 템포만 놓쳐도 플로우가 망가지니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빈야사 플로우를 서너 번만 타기 시작하면 의식 없이 몸을 움직이게 된다.
무아지경 뭐 그런 건 아니다. 순서나 박자를 놓쳐도 안되고, 근육에 집중해야 하니까 의식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하는 동작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의식도 없는 상태랄까? 가끔 잠이 안 올 때면 '아, 자야 해. 아니다, 자야 된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라고 밤새 생각하는데, 이것과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플로우 속에 있을 때만은 평소에 시달리는 고민은 물론이거니와 수련 끝나고 어떤 맥주를 마실지 따위의 잡생각은 매트 위에 들어설 새가 없다. 의식이 사라진 채로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다 보면 물질적 차원에서 '살아있다'는 게 무엇인지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실감'이라는 말은 육체적인 개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요가를 하다 보면 아주 구체적인 실감으로 나를 느낀다. 크게 숨을 쉬어 몸을 부풀릴 때, 그 숨을 천천히 길게 내쉴 때 나는 거기 있다. 좋다거나 싫다거나, 훌륭하다거나 하찮다거나 하는 평가 없이 그냥 살아 있는 순간의 내가 있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좌절할 것도 자부심을 느낄 것도 없다. 그냥 이 모양, 이 감정이 나라고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고가 아주 심플해져서 소소한 기쁨이 차오른다.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아림, <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202쪽)
아무 생각도 안 나는 와중인지라 고양이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다. (그나마 플로우 타기 전에 워밍업으로 하는 고양이 자세를 할 때 정도?) 슬프게도, 살다 보니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고 골골송을 듣는 것만으로는 마음의 폭주를 멈추기 힘든 날이 적지 않은지라 몸을 움직여 마음을 다스리려는 것이다.
대부분의 아사나는 균형 잡는 게 중요한데, 잠깐만 시선을 돌려도 한순간에 흐트러진다. 특히 다른 수련자를 의식하는 건 쥐약이다. 무조건 시선은 내 안으로, 호흡의 리듬을 놓치지 말고. 들이쉬고 내쉬고. 이렇게 24시간 중 한 시간이라도, 몇 뼘 안 되는 공간 위에서라도 나 자신에게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으니 나는 고양이를 혼자 두고 요가 매트에 선다. 이해해줄 거지요, 고양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