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해 씨는 이래서 산으로 간다 008, 변산
소리의 '바깥소리'를 듣다
“그때 기행과 벨라는 잠시 빗소리 안에 있었다. 그 소리에는 멀고 가까운 느낌이 없었다. 모든 것은 멀리, 그 소리 바깥에 있었다. 그 바깥에는 파도 소리도 있었고 바람 소리도 있었지만, 빗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다.”(<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160쪽)
이 문장에 꽂힌 이유는 소설을 쓰다가 문득 난 어떤 소리를 내고 싶을까?라는 고민을 다시 한번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 산행 내내 ‘소리’가 가득 찼고, 내가 듣지 못한, 귀 기울이지 못한 소리 바깥을 생각했다, 한참 동안.
변산은 어릴 적 친구들과 놀러 가기도 했던 곳이다. 지역 이름인 줄만 알았는데 산 이름이기도 했다. “내 고향은 변산, 가난해서 노을밖에 보여줄 게 없네,”라는 <변산> 영화 속 김고은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해서 지명으로 꽤 익숙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였는지 아니면 내가 전라북도 사람이라 마을 뒷산에서 봤던 것처럼 산의 지형이 익숙했는지도 모른다.
변산 관음봉은 해발 424m의 낮은 산이었다. 바위가 많아 힘들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 단풍이 들고 있어 내가 좋아하는 ‘주홍’ 색깔들을 찍기 좋았다. 아직은 시들지 않은 쑥부쟁이나 구절초도 간간히 피어 있어 산행하기에 딱 좋은 길이었다. 우중충해서 비가 올 것 같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인 날이었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 해찰을 하고 있는데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섭기도 했지만 호기심도 생겨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의 정체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도중에 혹시 저게 사람 소리라면, 서로 싸우거나 무서운 도끼 같은 걸 들고 나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면. 워낙 공포 영화를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기다리는 몇 초도 공포의 순간이었다. 무서움에 일행을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행여 이 소리를 상대방이 들었다면 일행이 내게 오는 시간보다 소리가 가깝게 들리는 쪽이 더 먼저 올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 소리도 죽어야 했다. 나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소리는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는 딱따구리였다. 너무 멀리 있어 아주 작게 보였지만 분명 딱따구리였다. 딱딱 따다닥. 일정한 속도에 맞춰 나무를 쪼고 있었다. 카메라 줌 인을 확대시켰지만 찍을 수 없었다. 새도 내 소리를 알아챘는지 멀리 날아가버렸다. 그 짧은 순간, 산속에서 뭔가 희귀한 새를 보았다는 짜릿함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오지 않자 일행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달렸다. 소리가 나는 것도 잊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일행들에게 딱따구리를 봤다고 하자 믿지 않았다. 난 분명 꼬리가 주황이고 다른 색들이 섞여 있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혹시나 나 같은 사람이 있나 하고 검색을 해봤다. 그런데 진짜 나처럼 변산에서 딱따구리를 봤다던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어떤 사람은 동영상까지 찍어놨었다. 나는 그 딱따구리에게 오색딱따구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는 딱따구리가 그 이름뿐이라서 미안했지만 색색들이 고운 빛을 봤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라 흥분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완만한 지형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산행은 즐겁기만 했다. 예전에도 수없이 이야기했지만 난 산행 중 침묵의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일행과 함께 있지만 어느 지점에 가면 서로 침묵한다. 사람들 틈에서 느낀 침묵의 시간과 다르다. 그때는 소외감을 느끼지만 산에서의 침묵의 시간은 서로를 존중해 주는 시간이다.
오늘 침묵의 시간의 주제는 ‘철학’이었다. 산을 오를 때마다 한 가지 주제를 갖고 가는데 며칠 전부터 내 소설에는 어떤 철학이 들어 있을까? 였다. 왜냐하면 며칠 전 소설 합평을 할 때 어느 작가가 내게 불교에 대한 철학이 부족했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듣는 순간에는 울컥하기도 했고, 당신은 그러면 내 철학에 대해 잘 알고 그런 질문을 하는 거요? 라며 화가 났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고민하던 문제랑 비슷한 거였다. 역시 사람을 속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봄과 여름, 나는 고려 시대의 마지막 민란에 대한 소설을 썼었다. 작년부터 쓴 소설이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다시 썼다. 자료를 찾는 것도 힘들었고 답사를 하러 다닌 시간도 많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민란이 일어났던 이유는 지배자들의 저항도 있었지만 불교의 폐단도 한 몫했다. 그래서 내가 잘 알지 못한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쓰면서도 불교에 대한 공부를 했더라면 더 깊은 내용을 담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초점을 둔 것은 민란이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해 상세하게 적을 수 없었다.
이런 점을 놓쳤는데 그것을 콕 집어 말하는 사람이 얄미웠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말이라서 안 고칠 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철학’에 대한, 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각을 정리해서 한 문장으로 담을 수 없었다. 게다가 특별하게 생각하고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렇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작가가 자기 소설에 대한 철학도 없이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시작되는 자괴감으로 괴로웠었다.
소리 바깥이 소리를 듣기 위한 길이었지만 결국에는 내가 원하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상하게 더 큰 의문이 생기고 이때껏 자신 만만하게 써 오던 소설이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또 생각을 더해 눈덩이만큼 커진 ‘철학’은 앞으로도 꾸준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찾는다고 해도 나는 멈춰 서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기에 이 문제로 계속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아쉽지만 답을 찾지 않고 남겨 두는 것이다. 다음에 또 산에 갈 때 나는 소리의 바깥소리를 듣기 위해 고요한 몰입을 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산을 오르는 이유는 충분하다.
<변산에서 본 야생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