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자세
단어의 사전적 풀이 자체도 가볍지 않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근본적인 내면까지 깊이 파고드는 생각의 폭을 의미한다.
삶에 닿아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치를 따져보기란 쉽지 않다.
저자는 20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빼앗긴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한 조건에서도 마음을 가다듬으며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본다.
글에서 사색의 깊이가 어느 정도까지 들어가야 되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은 저자인 신영복 씨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1988,8.15 특별 가석방)하며 옥(獄) 생활에서 써 내려간 편지들을 엮은 것이다.
그는 20대 후반에 복역을 시작으로 50이 다되어서야 세상으로 나왔다.
읽다 보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사고의 폭과 가치관의 깊이에 놀라게 된다.
감옥생활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박탈시키며 죗값을 치러내야 하는 법적 구속 공간 속에서의 삶이다. 죄의 크기에 따라 수감 기간의 길고 짧음은 정해진다. 반성의 삶이며 엄격한 규율 속에서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견디어야 하는 현생의 지옥과 그 의미를 견줄만하다.
그런 곳에서 20년을 버티어 내며 세상에 던져진 그의 글에는 삶이란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음을 일깨우게 한다.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주변의 모든 것에 물음을 던지고 하나씩 의미를 정리해 나간다. 삶의 본질과 인생에 대해 고민하며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쉽지 않은 도전이며 강한 의지가 없다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가족과의 서신을 통해서 쌓여간 글들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점차 성장해 가는 그의 생활을 짐작하게 된다.
생각이 갇히면 감옥에 갇힌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환경의 문제가 아닌 정신의 자유로움으로 사유를 펼칠 수 있는 개인 의지가 중요함을 전달한다.
사고의 탐구를 멈추지 않는 그의 자세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敎條)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것 같다._P139
현재 내 모습과 견주어 보았다.
시간을 가볍게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어진 삶에 너무 쉽게 대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꾸준히 정진하는 모습을 접하며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읽는 내내 밑줄을 그어가며 맘에 새기고픈 글들이 한 권을 가득 채우고도 남음이 있다.
고전, 인문, 철학 책 몇 권을 읽어낸 것처럼 많은 깨달음을 준 책이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어 몇 권을 지인들에게 선물하였다.
선물은 받는 사람의 마음보다 주는 이의 마음이 더 크기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선물에 포함된다.
책 선물은 본전 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난해한 선물일 수 있지만 읽어본 사람이라면 전혀 손이 부끄럽지 않은 책이다.
혹여나 받자마자 책장 구석에 쳐 박힐지라도 언젠가 보게 된다면 좋은 에너지가 되리라 생각된다.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조용하고 낮으며 진솔하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으며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편안하다.
지금껏 읽어온 책 중에 이 책과 견줄만한 것은 아직 보지 못했다.
너무도 많은 글들이 맘에 다가왔지만 다 소개할 수는 없어 그중에 몇 가지를 발췌하여 올린다.
‘차이’에 대한 이해 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는 없다. _P115
가을은 ‘글 읽던 밤에 달이 떠 있는 우물물을 깨뜨리고 정갈하고 시원한 냉수를 뜨며’ 잠시 시름을 쉬고 싶은 계절입니다._P116
모든 아이들에게 있어서 손님은 동경과 경이 ‘새로운 개안(開眼)의 순간이 되는 것_P131
‘길’이란 그 ‘향’하는 바가 먼저 있고 나서 다시 무수한 발걸음이 다지고 다져서 이루어지는 것_P145
무심한 일상사 하나라도 자못 맑은 정성으로 대한다면 훌륭한 ‘일’이란 우리의 징심(澄心)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릇은 그 속이 빔으로써 쓰임이 되고 넉넉함은 빈 몸에 고이는 이치를 배워 스스로를 당당히 간수하지 않는 한, 척박한 땅에서 키우는 모든 뜻이 껍데기만 남을 뿐임이 확실합니다.
서체란 어느덧 그 ‘사람’의 심정이나 사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은 그 ‘사람’과 함께 변화, 발전해 감이 틀림이 없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욕설은 어떤 비상한 감정이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 밖으로 돌출하는, 이를테면 불만이나 스트레스의 가장 싸고 ‘후진’ 해소 방법이라 느껴집니다.
동정이란 것은 객관적으로는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인정주의의 한계를 가지며 주관적으로는 상대방의 문제 해결보다는 자기의 양심의 가책을 위무(慰撫) 하려는 도피주의의 한계를 갖는 것입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_P244
역사-사물을 보는 관점의 일관성, 간결하고 적확(的確)한 사회인식, 과거에 투영된 현재
기다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게 하고, 생각을 골똘히 갖게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의 자리하나 굳건히 지키게 해주는 옹이같이 단단한 마음입니다._P269
봄은 발 밑의 언 땅을 뚫고 솟아 오르는 것.
옷은 새 옷이 좋고 사람은 헌 사람이 좋다.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며 쪼다는 즐겁다.
곡식은 비료나 지력(地力)으로 자라나는 게 아니라 일꾼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이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이다.-P313
세상에는 남의 행복과 비교해서 느끼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남의 불행과 비교해서 얻는 작은 위로도 있다.
온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비록 도덕적으로 타락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진실성을 훼손하지는 못한다.
작은 실패가 있음으로 해서 전체의 국면은 ‘완결’이 아니라 ‘미완’에 머물고 이 미완도 더 높은 단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되어줍니다. 더구나 작은 실패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과 사물을 돌이켜보게 해줍니다._P334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난 후 신영복 님의 책을 찾아보았다. 모두 사서 보았다.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1.2, 처음처럼, 강의, 담론, 청구회 추억.....
글뿐만 아니라 서예와 그림까지도 높은 수준의 예술미를 갖추셨다. 만약 이분이 감옥에 투옥되지 않으셨다면 더 좋은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