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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Feb 16. 2024

들꽃 기름


사위가 부스럭부스럭 짐가방에서 무언가 꺼낸다. 딱 봐도 친근하니 참진 이슬로 소주병인데, 담긴 건 맑은 이슬이 아니라 황금빛깔 그윽한 액체다. "어머니께서 장인어른 전해드리라 하셨어요."

옆에 있던 딸이 아빠 손에 꼭 쥐어준다. "아빠. 이게 완전 천연 오메가-쓰리래요. 아침 공복에 한 스푼씩 드시면 심혈관계, 소화기능에 좋대요."

사부인께서 직접 볶고 짜고 내린 백 퍼센트 국산 수제품이란다. 오오오. 이것은!


색깔은 진한데 투명하고, 맛은 고소한데 깊으며, 향기는 경쾌한데 가볍지 않다.
들기름이다. 그 비싸고 귀하다는 들에 핀 꽃기름이다.




쓰는 일이 즐겁고 재미나다는 어느 날의 이상한 각성에 이끌려, 끄적끄적 써 온지 어느덧  2년 6개월쯤 되었다. 잘 쓰는 작가님들이 이미 차고도 넘치는 이 땅에, 굳이 늘그막의 나까지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망설임이 컸지만, 글쓰기 모임(라라크루)에서 함께 쓰는 글벗의 다정한 응원에 용기 내어 쓰기 시작했고, 오늘 이 신새벽에도 쓰고 있다.


그러다 문득, '나의 쓰기가 세상에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말문이 턱 막힌다. 이 문장은 파르라니 새내기 <쓰는 자> 주제에 너무 건방지고 거창하다. 다시 바꿔본다. '나의 쓰기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제 됐다. 겸손하며 소박하니 올바른 문장이다.


궁금했다. 나의 들쭉날쭉한 마음,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나의 결핍과 전쟁 같은? 상처 또는 욕망과 희망 그리고 절망이.

한 문장으로 줄여서 <나>라는 이 인간이 궁금했다. "누구냐 넌"


돌이켜보고 생각해 보자. 중간 점검이란 걸 해보자. 그간 써온 꼭지글과 날자수를 뚝딱뚝딱 계산해 보니, 얼추 사나흘에 한 꼭지의 글을 써왔다.  매일매일 쓰는 작가들에 비하면 게으르미 스머프 이겠으나, 꾸역꾸역 쌓아 올린 문장의 고지가 야트막한 둔덕쯤은 된듯하다. 과묵 9단인 내가 무슨 할 말이 이다지도 많았을까.


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과정,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표현하는 도구, 구박 타박 그만하고 제발 좀 스스로를 사랑으로 이끄는 길이 곧 쓰는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해 왔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서 새벽으로 새빨개진 눈으로 어느새 천일에 가깝도록 쓰고 또 쓰고, 그만큼의 질량만큼 울고 또 울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카타르시스가 이런 의미 이려나? 정화 또는 자기 치유에 이르는 귀한 경험이었음에는 마땅하고 틀림없으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편으론,  <나>라는 좁디좁은 방구석을 넘어 오롯이 자유로운 해방에 이르고, 문장이라는 말을 타고 저 넓은 광야로 나아가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거침없이 쓰고 싶은 마음도 가득한데 날이 갈수록 힘에 부치고 의욕은 자꾸만 잠수 타려 한다. 하루하루 허덕이는 일상의 무게 탓이려나? 나이 탓이려나? 부끄러운 필력, 얇디얇은 지혜와 통찰, 자꾸만 넘어지고 주저하는 마음 때문인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정리하고 쓰고 고치고 다시 쓰는 일이 신경질 나게 즐겁고 재미났었는데, 쓸수록 어렵고 볼수록 허허롭다. 지난 글들을 다시 보자니, 부끄럽고 민망하며 쓸쓸하고 처량하다.


왜 쓰기 시작했고 왜 이다지도 마음고생인지 모르겠다. 사서 고생은 젊어서 해야하는데 말이다.

불쑥불쑥 파도치는 이 마음이라는 것은 장난스럽지 아니하다. 와장창 몰려왔다 콰르르 밀려가는데, 갱년기에서 번아웃으로 현타? 에 무기력으로 수십 가지 얼굴로 변화무쌍하게 다가오더니, 그 즐겁고 재미나던 마음마저 이리저리 휘젓고 동서남북 어질러놓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아마 이런 걸, 글태기나 슬럼프라고 하나보다. 아이고, 새내기 주제에 아주 할 건 다한다. 나이도 크게 한몫 하나 싶다. 환장하니 환갑인 건가? 아프니까 아저씨려나?  광석이 형의 <서른 즈음>보다 몇 배는 더 쓸쓸한 <예순즈음>이다.

예상은 했지만, 예순은 생각보다 고달프고 울적하며 맵고 시리다.




모름지기 슬럼프라는 건, 쓰는 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의 일상 속에서 거쳐가는 관문이겠다. 문장과 글의 무게를 기어이 감당해 내야 하는 작가의 통과의례라고 글 선배님들, 문장의 고수님들, 학교 교수님들이 또한 말씀하신다. 슬럼프는 생활인으로서나, 쓰는 자로서 당연한 일일 터이니, 그러게 세상에 만만하고 평탄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일에는 당연히 갈등과 시련이 있고 그래야 드라마틱한 로맨스나 웰메이드 인생작품이 나오지 않겠는가.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니, 역시 나는 쓰는 일과 연예빠진 게 분명하다. 콩깍지도 이런 콩깍지가 없다. 어느 훗날, 콩깍지가 벗겨져도 이 사랑을 사랑하겠는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 그래. 이 사랑에 이별은 없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연예이니 그래야 한다. 사랑과 의리, 세월의 정이 사람간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부인의 정성 가득한 들기름 한 스푼을 마음으로 읽고 가슴으로 적셔보니 오메가-쓰리 황금 병사들이 온몸 구석구석 모든 세포로 헛둘헛둘 총총총 진군한다. 우당탕탕 시끄럽던 마음에도, 삐걱삐걱거리던 관절 마디마디에도, 희미하니 지쳐버린 실핏줄에도 향긋한 꽃기름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들에 핀 꽃처럼 부드럽고 천천히 편안하게 글의 길 걸으라는 고소한 시그널이다.

"환장"보다는 "차분"이, "헛헛하니" 보다는 "그러려니"가 필요한 시점이리라. 쓰는 일의 의미도, 목적도 더욱 고민하고 재정의 해보라는 내 안의 목소리가 가슴팍에서 둥둥 북소리처럼 울려온다.


어디 글쓰기뿐이겠는가. 우리네 사는 일상을 때때로 수선하고 정리하고 재정립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가 어여삐 여기고 내가 나를 긍휼히 대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 쓰는 일은 살아가는 일. 펄쩍펄쩍 널은 그만 좀 뛰고 뻑뻑한 가슴에 윤기 나게 기름칠하여 닦고 조이고 흐르는 강물에 유유히 몸과 마음을 맡겨보자.


수십 번의 시린 겨울을 험난한 광야에서 지나왔건만, 유난히 버거운 올해 겨울이다.

흔들리며 피어나는 게 어디 꽃뿐이겠는가. 어쩌면 난, 들에 핀 가엽거나 귀여운 한떨기 꽃.

한송이 들꽃이 예순이라는 여울목을 지나는가 보다. 차분히 추스르고 잘 지나가보자.




명절 때 감사 인사도 못 드렸지만 이제라도 사돈과 사부인께 전화드려야겠다. 

가난한 나는 드릴 게 없으니, 향기롭고 따뜻하거나 재미나고 살아있는 문장으로 보답드려야겠다.

꾸준히 배워가며

나를 넘어

다시 광야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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