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적당히"가 없다. 폭염 아니면 태풍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적당히"가 없기로 치자면 나 또한 만만치 않은가. 변변치 않지만 지나온 개인의 역사가 이를 웅변하고 지인들이 증언한다. 어휴. 저거 저거 지독한 놈이라고. 순한 표범 같은 놈이라고. 말보다 행동으로 말하는 녀석이라고. 술이 떡이 된 날에도 책 보더라니까.
(* 이 부분은 젊었을 때 이야기이니 오해없길 바래요.)
이야, 말도 말어. 적당히가 없는 녀석이라고.
타인의 평가가 어떻든 크게 개의치 않지만, 내가 나의 셀프를 생각해 보면 얼추 맞는 말이다 싶다. 좀 뜬금 없으며적당히도 없는 녀석이다. 주로 내가 나에게.
<도> 아니면 <모>! <승> 아니면 <패>! 이른바, 자칭 상남자다. <빽도>나 <패>에 직면해서도 무릎은 꿇지 않는다. 다만 와장창 넘어지고 꾸역 꾸역 다시 일어설 뿐.
새벽에 <종다리>라는 태풍이 항구를 스쳐간다. 스쳐도 사망이라더니 역시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 "적당히"는 없다. 인정 사정 없고 장난도 없다. 가차 없이 쏟아붓는다. 양철지붕이 따갑다 못해 엉엉 운다.
오냐. 여름아.어디 한 번 해보자. 더위 먹고 정신 잃고 "개걸윷" 없던 이 아저씨는 신발끈 질끈 동여매고 공원 새벽 에어로빅 댄스팀에 모처럼 참여한다. 어휴. 대단한 어르신들은 이미 나와 계시다. 리스펙!
난 이 팀의 막내다. 언제나 막내를 면하려나.
몸풀기 댄스 곡 두세 곡이 지나자 본격적인 살풀이? 댄스가 시작된다. 쏟아지는 빗물에 아랑곳없이 무념무상 족보 없는 몸짓이 한바탕 어우러져 그 자체로 하나가 된다. 자연이 된다. 이른바 "태풍댄스!"다. 우리가 종다리다.
그 속. 태풍의 눈 속에서 보니 이 장면이 숭고하고도 장엄하다. 우리의 생애도 그러하겠지?
아뿔싸. 대항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연이 아니라, 0 아니면 1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다. 적당히는 없다라고 외치는 순간의 완고한 고집이다. 여름철 태풍 속 폭염 속 댄스도 있지만 슬슬 더워지려던 초여름 연두 속에서도, 무더위 살짝 꺾여 숨 좀 쉴만한 청록의 날에도 우리는 춤추며 리듬에 몸을 실었고 이 또한 자연이었다. 사계절로 확장해 보자. 몇 줄의 문장으로 담을 수 없이 드넓은 자연이었고 그 고요한 숲 속 한가운데 내가 있다.
그렇지. 내가 춤추고 있는데 펄펄 눈 오고 와장창 비 오고 꾹꾹 더위 내리고 고즈넉이 잎새 날리고 사랑살랑 꽃바람 불 뿐이다. 날씨와 감정에 예민하되 이리저리 휘둘리지는 말라했던가. 신은 죽었으니 스스로에게 집중하라는 니체와 순수이성과 정언명령을 스스로 품고 올곳이 따르라는 칸트의 말씀은 내 안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라는 뜻이겠지?
삶의 폭염에 인생의 태풍에 놀라거나 위축될 일이 아니고, 하고자 했던 걸 못해서 두려워하거나 짜증 내고 외부의 변수만 탓하며 휘둘리지 말고, 이분법을 지우면,
수많은 적당히가 혹은선택지가 튀어나온다는 의미로 해석해본다.
세상에는 성공과 실패 단 두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니체의 말처럼 덥다와 춥다만 있는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적당히"도 있다. 그러니 또한 궁금하다. 수천 갈래의 중용, 천 겹의 다양,천년의 흔적.
덥다와 춥다라는 상대적 표현을 경직된 디지털이라면 적당히는 유연한 아날로그로 비유할 수 있겠다.
으슬으슬한 게 몸살이 오려나 보다. 항구의 어르신들보다 아직은 내공이 부족한가 보다. 적당히 춤출 걸 그랬나 보다. 이젠 살살 좀 하자. 내가 나에게.
살아가는 지혜를 알만한 나이가 되었어도, 참 꾸럭 꾸럭 말썽꾸러기 녀석이다. 그래도 즐겁다. 이런 내가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