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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Oct 12. 2021

애관, 1관 N열 14번

울어도 좋다.

1관 N열 14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마실 가듯 동네 극장에 간다.   

팍팍한 일상에 윤기 좀 좔좔 칠하고, 다양한 장르의 스토리텔링 탐구를 통해 저물어가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어떻게든 살려보려 함이 원래 목적이었지만, 거두절미하고 그냥 재미난 거 뭐 없나 보러 가는 거다.

그리고 또한, 나의 최애 여배우 손예진 배우님이 극장 앞 길목에서 나를 반겨 맞아주기 때문이다.

극장 앞 길목에 위치한 여성복 의류매장 전면 유리창에 붙어있는 그녀의 대형 브로마이드.

코너를 돌자마자 손예진 배우님이 "오빠 ~" 하며 힘껏 뛰쳐나올 듯한 기대감은 나이를 먹어가도 변치 않는 그런 것 중에 하나이다.

이상한 스토커가 아니라 오랜 팬으로서의 그런 팬심 말이다. 그녀가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 괜찮다. 내가 또 좋아하는 현빈이랑 부부가 되었으니 말이다. (선남선녀의 행복을 기원해야 마땅하다.)


그 소박한 동네 극장은,

CGV, 메가박스 같은 최첨단 상영관이 아닌 126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인천 애관극장이다. 국내 최초의 실내 영화관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126년이라니...후덜덜이다. 

그 세월의 나이테가 극장 구석구석을 꽉 차게 메우고 있다.

나는 문세형의 노래처럼 언제나 조조할인만 가는 짠내 가득한 알뜰 문화 소비자이다. 

담배는 모닝 첫 식전 땡이 제맛이고 영화는 역시 조조가 찐 맛이지. 그럼.

세월의 풍파 속에 극장은 다소 누추하며 얼마 전에 들여놓은 무인 티켓팅 시스템 키오스크만이 주변 배경과 동떨어진 생뚱맞은 홀로 동동이다. 그래도 이 시국에 영화라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지 않는가? 

매우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문화공간임에 틀림없다.

요즘 코시국에 관람객은 많아야 십여 명. 어느 날엔가는 완전 혼자서 본 적도 있다. 이런 걸 완전 독채 찜 전세 냈다고 표현하는가? 좌석도 고정, 1관 N열 14번. 2층 로얄석. 

그야말로 나만의 영화관이자 나만의 좌석이다. 이것은 코 시국에 누리는 희한한 호사이자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코시국이 끝나면 이런 작은 행운도 멈춰지겠지. 그래서 코시국아 끝나지 말아라 하고 생떼를 부리지는 않는다. 아무렴 그럴 리가.

어쨌든 오래 기억하려는 좌석번호 1관 N열 14번이다. 이런 사소한 것도 기억하려고 하는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소소한 일상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친 것과 일상으로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발로 이기도 하겠다. 어떤 마음이 되었든 어느 먼 훗날에 미소 가득 품고 기억될 작은 추억의 좌석임에는 또한 틀림이 없겠다.


극장에 다니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나름 분위기 한껏 내보려고 팝콘, 콜라, 오징어 다리 등의 다양한 군것질 거리도 잔뜩 사서 좌석 양쪽 팔걸이에 걸쳐놓고 야무지게 먹기도 했지만,  

극장에서 혼자 먹는 팝콘이나 오징어 다리는 별 의미도... 별 맛도 없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하고는 다신 안 사 먹는다. 물론 군것질거리 자체가 맛이 없기야 하겠냐마는 그보다는 혼자라는 쓸쓸함이 오히려 더욱 조명받는 그 궁상의 실루엣이 자꾸 양쪽 귀를 벌겋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명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돼도 내 빨간 귀만 홀로 동동이다. 

극장에서의 군것질 거리는 역시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의미가 있고 맛도 있다는 엄연한 역사적, 지구적 Fact를 확인하는 순간이리라.

그냥 혼자라도 영화를 보러 가는 용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일단 거기까지.   

이 주변머리 없는 성격에 혼영이라니. 그것만 해도 기적이지 말이다.




얼마 전에 기적 같은 일은 또 있었다. 그때 본 영화의 제목은 마침 '기적'이었다.

외딴 오지마을에 기차역을 만들기 위해 한가족과 마을 주민들의 벌이는 애환의 이야기를 풀어낸 영화이다.

잔잔한 감동과 힐링을 주는 스토리인데 중간에 그만 울컥 눈물이 나고 말았다. 가족 간에 살아오면서 맺힌 오해와 상처. 그것을 겨우 겨우 풀어내며 이어지는 용서와 회환.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를 행하는 양방이 모두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지만 결국, 스스로를 향하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본인을 치유하는 역설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 역으로 출연한 이성민 배우님의 열연도 있었지만, 그 장면에서 울컥 내린 나의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그만 폭풍 오열이 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마스크 덕분에 그런 나의 모습을 얼추 감출 순 있었지만 그 상황이 황당하기도 하고 부끄럼은 울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양쪽 귀는 빨갛다 못해 익어버릴 지경이었다.

마침 그날은, 지금 살고 있는 월세방의 주인집 아주머니도 영화를 보러 오셨는데 바로 앞줄 좌석에서 행여나 뒤돌아 보실까 봐 억지로 꾸역꾸역 눌러가며 마스크가 흠뻑 젖도록 한참을 울고 말았다.

아... 이것은, 백만 년 만의 눈물이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이제 눈물도 감동도 메말라 있던 50대 아저씨의 저 사하라 사막 같던 가슴팍에 오아시스 

같은 눈물이라니. 나 또한 개인의 결핍과 강박을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서 대입하고 공감하며 시나브로 정화되는 경험. 그런 몰입의 시간이었던 듯싶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평소의 그것과는 다르게 흘렀다.

영화든 연극이든 글, 그림, 음악... 그 무엇이든 그런 것이 문화의 힘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우리 모두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아저씨도 울면 좀 어떤가. 이젠 시대도 많이 변했는데. 아저씨가, 나이 든 남자가 좀 울었다 해서 뭐 그리 큰일이란 말인가? 눌려있던 큰 바위 치우고 홀가분한 마음과도 같은 그런 눈물이라면,

이제는 부끄럽거나 민망해하지 말기로 하자.

어쩌면 저 또르륵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은 스스로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는 용기의 여정이자

위로의 한걸음이고 삶에 대한 정직한 태도가 아닐까?

목석같은 사내도 한 편의 영화를 빌어 시원하게 한번 실컷 울어버리는 것.

그것은 분명 기적 같은 일이 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일상이 기적이겠다.

우리가 처음 태어났을 때 그 기적 같은 첫울음처럼 말이다.


극장을 나서는 정오의 햇살은 보드랍고 따듯했다. 어머니의 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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