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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Nov 10. 2021

트렌치코트여 영원하라

일상에서의 평행이론

어느 가을날, 친구같이 다정한 딸과 오랜만에 통화를 하였다.

이런저런 근황 토크가 이어졌고,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세심한 아빠는 당부의 말을 시작한다. 

아빠 : "트렌치코트는 있니? 챙겨 입고 다니거라."  

딸    : "벌써 패딩 입을 날씬데? 트렌치코트 입을만한 가을 날씨가 아니에요. 초겨울 날씨랍니다 ~ 쿄쿄쿄.

          아니 근데 아빠는 왜 가을만되면 나에게 트렌치코트 입히려구 그러실까?"

아빠 : "응? 그랬었나?"  

생각해보니, 매해 가을마다 그랬던 것 같다. 날씨가 쌀쌀해지고 나무가 잎새를 떨구고 두터운 옷을 입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게 되면.  아, 이제 우리 딸도 트렌치 코드 입을 때구나. 어서 연락해야지. 그래왔던 기억이 되살아났고 딸도 이미 알고 있던거다.  


그나저나 내가 왜 트렌치코트에 꽂힌 것일까? 그냥 멋스럽고 따듯해 보인다 하기에는 뭔가 다소 부족하다.

더군다나, 무슨 화려한 연애경험이 있어서 어떤 묘령의 트렌치코트 여인과의 근사한 로맨스나 애틋하고 달달한 사연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생각과 추적의 꼬리는 까까머리 중학생. 2학년 그 시절에 닿아 있었다.

가을 무렵에 트렌치코트 입고 낙엽 만발한 교정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걷던 선생님.

영화의 한 장면 또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하시던 그 선생님. 국어 선생님.

그 모습이 어찌나 단아하고 모던하고 멋스러웠는지.  

멋쟁이 여성 어른의 아이콘이 된 그 이미지가 오랫동안 뇌 어느 구석엔가 각인되었다가

그 무렵의 계절만 되면 챙겨 입어야 할 의상은 트렌치 코트라는 형상으로 대표성을 띠게 된 것이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이미지 파일은 영락없이 소환되어 자동 오픈되는 뇌의 기능은 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러한 경우를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지구촌의 여러 철학자들, 심리학자들이 오래전에 간파했지만 이제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많이들 설파하고 있다. 아무튼, 인류의 뇌는 참으로 신묘하기만 하다.

 

지금이야 다양한 종류와 브랜드의 명품 의상들이 차고도 넘치지만 그것을 명품의 가치답게 소화해 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이리라.   더군다나, 값비싼 명품이 아니더라도 어느 명품보다 멋지게 소화해내는 것은 진정한 패션피플의 자부심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는데 그런 의미의 명품이 나에게는 밍크도 아니요, 모피도 아니요, 버버리도 아니요. 오로지 트렌치코트인 것이다.


중2 남학생에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멋진 이미지로 남아있는 선생님의 그때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딱 지금의 우리 딸 또래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평행이론이라 하는 것인가? 마침 딸은 학원에서 또한 유튜브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 아닌가? 1차 소름...

딸에게 매 가을마다 트렌치코트를 입으라는 아빠의 정기적인 Notice. 그 뿌리에 대한 궁금증은 이렇게 해결되었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했던가? 행동은 의식 또는 무의식에 따른 결과에 다름 아니라는 의미에서 습관처럼 행하는 많은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더 생각을 확장해보니, 함께 소환된 기억은 트렌치코트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을 떠올리다 보니 또 다른 연결의 끈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그것은 꿈에 관한 이야기이며 과거와 현재, 또한 미래에 관한 일이기도 하겠다.


1977년 인천 동산중학교 2학년 교실. 어느 수업 날,

시인이자 교사이셨던 선생님께서 교과서의 시 한 편을 낭랑하게 낭독하시며 K의 옆을 지나시다가 하신 말씀,

선생님 : "어머. 얘. 수업내용을 노트에 아주 꼼꼼히 정리하는구나. 어쩐지 눈빛이 초롱초롱하더니만~

            얘들아. 너희들도 이처럼 정리하고 복습하고 해야 K처럼 공부를 잘하게 되는 거란다. 알겠지?"

(선생님의 칭찬이 이어지자, 친구들은 벌떼같이 몰려들어 K의 노트를 보더니 이내 객쩍은 소리들을 하고 자리로 물러갔다.)

친구들 : "아이고, 난 못하네 ~ ^^"

선생님 :  "K는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꿈이 뭐야?"

K         : "멋진 글 쓰는 작가이자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친구들  : "하이고, 재 멘트 보소. 잘났어 정말..."

(어느 가을날 오후. 햇살 좋은 교실에서는 대충 이러한 대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선생님은 K를 무척이나 이뻐하셨고, 친구들에게 K는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국어 점수는 언제나 만점. 최애 과목은 국어였으며, 그날 이후로 선생님께서 여러 글짓기 백일장이나 이런저런 행사에 K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던 기억들이 고구마 줄거리 캐듯 줄줄이 아련히 소환되었다. (갑자기 자랑질을 된 것 같아 다소 민망합니다. 이야기의 전개상 필요한 부분이라는 점에 대해  독자님들의 심심한 양해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처럼, 작가이자 국어 선생님이 되고자 했던 꿈은 중학생 시절부터 이렇게 세팅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고, 공대, 전자회사, 컴퓨터 회사... 그렇게 K는 꿈과는 거리가 멀지만 밥과는 좀 더 가까운 길을 가게 되었고 무심한 세월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버려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소박한 꿈은 세월 속에 묻히고 잊혔으나, 무의식의 뉴런 세포들이 깨어나 나에게 조용하지만 단호한 시그널을 준 것이 아닌가 살짝 소름이 돋는다. 먼길 돌아왔지만, 이렇게 브런치라는 마당에서 멋진 작가를 꿈꾸는 초보 작가로서의 활동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도 어찌 없겠냐마는, 다시금 글을 써보겠다고 시도하고 있는 나의 소소한 도전이 어느 날 뚝딱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었다.  이 또한 평행이론의 증거 아니겠는가. 바로 2차 소름의 순간이다.

"쓰고 싶어 하면 언젠가는 쓰게 되겠지요. 업이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업이 되어서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라고 쓰는 일에 대한 업을 설명해주신 법정스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이러한 사고와 현상을 굳이 거창하게 무슨무슨 oo이론에 따라 분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과거와 현재의 느슨한 끈의 연결성을 추억함과 동시에  수십 년 후의 미래를 예상해 보는 일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며 때론 이런 생각은 자못 유쾌하고도 발랄하다.


대략 30년 후, 환갑이 다된 딸에게 트렌치코트 챙겨 입으라는 구순의 멋진 작가 아빠의 흐뭇한 미소.

이 얼마나 따수하고 정겨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근사한 작가가 되어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모습. 이 또한 설레이지 아니한가?

쌀쌀한 날씨이지만,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가 마음 한편을 훈훈하게 한다.

소소하지만 야무진 드림 컴 트루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선이.마음이 따스한 그리고 건강한. 작가가 되는 것이 우선이겠다.

좀 더 열심히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트렌치코트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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