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나무는 나에게 '지켜보는 자' 또는 '지켜주는 자'이다. 어디 아픈데 없는지 제대로 걷고 살고 있는지 쓰는 일상은 휘청거리지 않는지 꼼꼼히도 지켜본다. 긴 가지로 등을 토닥이고 잎새의 바람으로 두 볼 쓰다듬으며 지켜준다. 말은 별로 없어도 지켜본다는 뜻은 지켜 준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나는 숲의 나무에게 '말 거는 자' 또는 '이야기하는 자'이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인간이 시비를 걸어왔으며 그 인간에게 괜스레 웃긴 아재개그도 던져보았고 커피를 너무 마셨더니 어지럽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다는 둥 고수레 고수레 많은 이야기를 한다.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는, 나무님아, 너의 하루는 어땠느냐며 살갑게 말도 건다. 그 둘의 수다는 폭풍처럼 고요하다. 한 순간도 심심할 틈이 없는 산책길이다. 그렇게 나는 자연의 품으로 저벅저벅 들어가고 나무들은 그런 나를 한껏 안아준다. 그렇게 서로는 하나의 풍경이 되어간다. 그러니 산책하는 자, 우리는 모두 자연인이다.
나무는 다 보고 있다. 함께 올린 사진을 보시라.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따끔한 감시라기보다는 따뜻한 시선이다. 과장법이 과하거나 MSG를 너무 뿌린 이야기를 전하면 대번에 알아챈다. 귀신을 속여도 너와 나를 속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제대로 보고 똑바로 말하라고 한다. 쓰는 자의 헌법 제1조 1항이라고 호통친다.
이름 모를 나무님에게 이름표를 붙여주었다. <나무귀신님>.
나는 과연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맑은 눈에 맑은 세상이 고이고 조금은 더 맑은 세상으로 이끌 텐데 먹고살기 바빠 흐린 기억 속의 나는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데 자꾸만 낡은 눈이 앞을 가린다. 그래도 애써 본다. 쓰리고 아린 눈으로 내가 나무님을 자주 보는 이유다. 가끔은 흠뻑 울기도 하는데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기에 괜히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역시 단순하고 무지몽매함에 틀림이 없다.
오늘은 나무귀신님에게 고민 하나 털어놓았다. "좁디좁은 동네 공원에서 벗어나 이제 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많은 길에서 더 많은 문장을 탐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러자 나무님이 말했다. "좁은 건 공원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란다. 마음을 펼치면 언제 어디서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단다." 나의 뒤통수는 뜨거워졌다. 맑고 고운 구름이 나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추석이다. (90년대생) 아이들이 (60년대생) 아빠 보러 온단다. 허구 한날, 꽈당핑 피곤핑으로 상징되는 아빠 말고, 올 추석에는 일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묵묵히 지켜주는 듬직한 나무아빠로 지켜보자. 조금은 말갛고 맑아진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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