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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리다

by 김호섭



낯설다. 이렇게나 맑고 고운 날씨라니. 이런 청명이, 저런 찬란이 언제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쩜 한 톨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려 해도 기억하지 않는다. 분명하다. 오늘은 새 날. 오늘은 새 가을날이다.
그래, 어서 오너라 가을아.

빨래를 했다. 여름 땡볕에 빛바랜 티셔츠, 겨울을 준비하는 털모자. 탁탁 옆구리 두드려야만 돌아가는 세탁기에 모두 넣고 빙빙 돌린다. 여름과 겨울이 한 드럼 안에서 어지럽게 회전한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여 뒤섞이는데 현재는 어디 있는가. 나 여기 지금 여기 하면서 꼬로록 회오리 물결에 휩쓸려 속절없이 사라지는가. 그럴 리 없다. 과거의 미련과 미래의 불안을 풀어헤치고, 오늘을 씻기고 헹군다. 그 자리에 남은 건 피죤 향, 향기로운 평화는 그렇게 오나 보다.
고요가 우당탕 거리던 흔들림의 최종 목적지인 것처럼.
나 닮은 낡은 세탁기야 애썼다.
가을아 고맙다.

빨랫줄에 널었다. 셔츠와 모자를 널고 나를 널었다.
여름내 지쳐버린 마음도
추석비 젖어버린 영혼도
온종일 어지러운 연필도
대롱대롱 세상에 매달린 나도 마르겠지.
다시 살아가겠지.

여름도 겨울도 맛나게 버무려
가을볕에 말리는
한나절

오호라
현재는 그냥 손 놓고 넋 잃은 머무름이 아니라, 애써 매달림이다.
흔들리면서도 오늘을 놓지 않는 자의 선선한 숨이다.

마땅히, 현재는 동사다.
움직이고, 흔들리고, 덜컹거려도 끝내 바람에 매달린다.
비로소 그 속에서 반짝이는 자유로운 나부낌이다.
제법 괜찮은
품사다

바람이 곱다.
그러니 바람결의 너도 곱다.
오늘의 우리는 곱게 매달린 현재다.


#가을 #볕 #빨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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