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헌팅당하는 남자

by 김호섭

1. 어떤 글은 막 쓰고 싶어, 고목나무에 딱 붙은 딱정벌레처럼 노트북 화면에 딱 붙어 주르륵 쓰는 글이 있고

2. 어떤 글은 '작가의 서랍에' 고이 모셔만 두고 있다가 미루고 미뤄 지구 끝 낭떠러지로 밀고 밀려 허덕허덕 쓰는 글이 있고

3. 어떤 글은 내가 왜 이걸 쓰기 시작한 거지? 시작은 했으니 마무리는 맺어야지 하면서 (울면서) 쓰는 글이 있고

4. 어떤 글은 쓰지 말아야지 하는 글이 있다. 안돼 이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사회적 물의가 예상되는 글)


4번 쓰지 말아야지 했던 글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의 글이다. 이유는, 괜한 자기 자랑 또는 자아도취에 빠진 글이라고 독자들로부터 쏟아질 지탄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이 인간 언제 철드냐...

한숨 가득 어이없음의 끝판왕 같은 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쓰기로 마음먹고 노트북 앞에 앉는다.

쓸거리가 떨어지기도 하거니와 때론 싫은 것도 해야 되는 게 인생이고, 작가로서 자기 검열도 깨보고 그래야 하니까.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도 중의 하나로 너그럽게 봐주시면 되겠다.


사설이 길었다.

시간은 언제나 새벽 3시. 장소는 언제나 방구석이다.

. 써보자.




그렇다. 헌팅당한다.


강렬한 첫 문장이다.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 문장이다.

흔하디 흔한 남녀상열지사 인간사에서 이게 무슨 큰 이슈냐 하겠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아직도"라는 점이다. 예슨즈음의 나이는 청준도, 젊음도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 어르신 레벨도 아니다. 어중간하다.

옛날에야 환갑이라고 해서 동네잔치도 하고 떡도 돌리고 그리했지만, 평균수명 100세 시대인 요즘은

뭐라 똑부러지게 규정하기 참 애매하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이 세대를 신중년, 시니어, Active 시니어, 5060 등 두루 묶어서 표현한다.

다 별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꽃중년'이다. 정부의 공식 단어는 아니겠다만, 어느 네티즌이 지은 명명인지

몰라도 참으로 근사하고 내 맘에 쏙 드는 단어이다.

'중년'에 그 예쁜 '꽃'을 붙여주니 이 얼마나 화사하고 향기로운가 말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생생을 부르거나 글로 쓸 때는 형용사이자 대명사인 '꽃중년'을 붙이기로 하자.


꽃중년 생생은 매주 금요일 퇴근길에 들르는 곳이 있다.

'미술관'이다. 여기서 감상하고자 하는 것은 예술가들의 미술작품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한자 맛味/ 우리말 술/ 한자 집館 즉, 맛있는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집이라는 프랜차이즈 주점이다. 그럼 그렇지. 참새가 들르는 방앗간 같은 곳이다. 일주일의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 해소가 주목적이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집인데, 손님은 주로 2030. 제공되는 안주는 온갖

산해진미가 풍부하다. 생생은 고풍스러운 외관과, 단순하면서도 유별나지 않은 내부 목조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 선택한 곳인데 영락없이 젊음이 와글하다. 희한하다.

젊음의 에너지가 나를 끌어당기는 건가? 내가 아직 젊다는 착각과 환상 속에 사는 건가? 모를 일이다.


어느 금요일,

어김없이 미술관에 나타난 생생은, 어김없이 주문한다. 생생이 주문하는 메뉴는 온리완 '할인의 행복'메뉴다.

삼겹살 + 김치 + 마늘 + 고추를 합체한 안주다. 여기에 이슬이면 환상의 궁합이다. 게다가 저렴까지.


고즈넉이 이슬과의 수다를 떠는 중,

어느 여인이 다가온다. (30대 후반 ~ 40대 초반으로 보인다. 사실, 생생은 여성의 나이 가름을 잘 못한다.)

여인 : 저... 혼자 오신 듯한데, 같이 한잔 하실래요?

생생 : (산전, 수전, 공중전, 화생방전, 육박전, 막걸리엔 김치전을 두루 겪어 온 생생이지만 순간 당황하면서)

네? 저요?

여인 : 네. 입장하실 때부터 쭉 보고 있었는데 혼자 오신 듯해서요. 저도 혼자 왔거든요.

생생 : (말로만 듣던 포차 헌팅의 순간이다. 화들짝 놀랐으면서도 짐짓 담담하게)

아.. 네.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얼른 마시고 가봐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양한다.)

여인 : (갑자기 생생의 옆자리에 덜컥 앉는다.) 왜죠? 왜 안된다는 거죠? 제가 왜 싫죠?

생생 : (아... 취하셨구나) 제가 급히 할 일이 있어서요.

여인 : 급한일이 뭔데요?

생생 : '쑥과 마늘'이라고, 좀 좋은 인간이 되어라 하는 프로젝트인데요. 걷기 미션 수행을 해야 되거든요.


여인은 벌떡 일어나 자리로 돌아가다가, 휙 생생을 노려본다. 여인이 쑥과 마늘이 뭐냐고 묻기도 전에 생생은 도망치듯 서둘러 자리를 나선다. (하여튼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이 인간의 단호함은 고쳐지질 않는다.)


피 헌팅 사건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살짝 사례발표를 했더니, 어디서 구라 질이냐, 너 요즘 글 쓴답시고

없는 얘기 막 떠들고 다니면 나라에서 잡아간다느니 친구들의 타박이 이어진다. 제발 상상 좀 고만하고 현실 속에서의 연애를 하라는 둥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이 인간들 속고만 살아왔는지 믿지를 않는다.

어이구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냐. 매력 넘치는 남자가 살아가야 할 일상의 고충을...


돌이켜보니, 올 한 해만 해도 서너 번의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장소만 다를 뿐, 다가오는 건 여인이고 도망가는 건 생생이다. 절대로 상상이나 꿈속이나 비현실이 아니다.

현실이고 모두 Fact다. 증거와 증인은 차고도 넘친다. 친구들아 독자님들아 제발 좀 믿어주시라.

생생이 먼저 추파를 보내거나 시그널을 주거나하는 그런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은 없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주변머리도 속알 머리도 없다. (실제로 실물을 보면 바로 안다.)

그 저 숨만 쉬고 앉아 있어도 일어나는 일상 다반사이다. 어쩌란 말이냐. 이 죽일 놈의 매력이여...


희한한 일이다. 젊은 직장인 시절에는 전혀 없던 일이 나이 들고 늘그막에 이게 무슨 횡재(?), 아니 사건이란 말인가?

나이 먹어가면서 더욱 멋지고 매력이 넘치고 있다는 반증인가?

그렇다면 내가 꿈꿔온 은은하고 멋진 노년의 시대가 점점 열리고 있다는 것인가?

(멈추지 않는 지자랑질에 짜증 나서 나가시려다가... 꾹 참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 작가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위의 피 헌팅 사례처럼 일시적인 해프닝 같은 경우뿐 아니라

해가 갈수록, 새로운 인연 맺기를 두려워한다. 친구든 연인이든.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다시 상처받기가 두려워서 머뭇거리고 도망가고 회피하는 마음도 없지 않겠다.

이런 마음은 기본적으로 무겁다. 무거운 마음으로 도망 다니다 보면 지친다.


낯선 여인과 술 한잔 하는 게 뭐 그리 무거운 일, 무서운 일이라고 유난스럽게 구느냐.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한잔 하면 될 일을.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그저 노을 가득한 석양에 손잡고 슬슬 산책이나 하면 될 일을.


생생은 마음의 혼란을 겪는다. 가을 타나 보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상처받더라도 다시 일어설 회복 탄력성을 키워라. 용기를 내면 될 일이다."

(말이 쉽지 그게 쉬운 일이냐? 나같이 파르라니 여린 인간에겐 애시당초 시작을 말아야 할 일.)


이렇게 마음 어지러울 땐 지혜의 여신을 찾아뵈어야 한다.

주말 어머니와의 수다시간에 슬쩍 피 헌팅 사례들을 보고 드려 본다.

어머니 : 아이고 이눔아. 본인 하나 앞가림하기도 허덕이면서 무슨 헌팅을 하고 다닌다고?

제발 정신 좀 차려줄래? 내가 이렇게 엉뚱한 너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겠느냐...

그리고, 너. 술좀 그만 먹고 다니라고 그렇게 얘기했건만... 등짝 스매싱 한번 맞아볼래?

생생 : 아니, 그게 아니구요. 수동태라니까요. 제가 헌팅하는 게 아니라구요.

어머니 : 별일도 다 있구나. 하긴, 우리 아들이 잘생기긴 했지. 그럼 그럼.

어머니 + 생생 : 깔깔깔, 꺄르르 꺄르르


어머니와의 수다는 즐겁다.

생생은 지금 효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팔순 노모가 자식 밥 굶고 다닐까 봐 반찬거리 만드느랴, 찌개거리

만드느랴 시장이고 마트고 씩씩하게 돌아다니신다.

이 엉뚱하고 허술한 예슨즈음의 아들에게 일주일 분량의 일용할 양식을 주섬주섬 싸주시기 위해서다.

밥도 한 공기 가득 뚝딱 드시고 목소리는 쩌렁쩌렁하시다.

여기에 아들 피 헌팅사례로 한번 웃겨드렸으니 효도 아이템 한 개 더 추가한 셈이 된다.

어머니는 더 씩씩, 더 건강해지실 것이다. 이런 효자가 곁에 있으니.

(참조 글 : @안희정 작가님의 효자상 https://brunch.co.kr/@4d6a5acc5571479/30 )




연애라니요.

어쩌다 헌팅당한다고

어이구 네가 아직도 젋은줄 아느냐

아서라. 인간아.


타기에 좋다 하지만,

고독하게 무르익기에 좋은 계절이다.

가을이다.


가을아 가을아 이 인간 좀 제대로 익혀라.

정신 좀 차리게.


* (이 글은 괜히 쓴 것 같다. 4번 카테고리 글로 그대로 둘걸.)


한줄요약 :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는법이고,
가을이란 계절은 고독하게 무르익기에 좋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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