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 오름
‘오름의 왕국’ 제주에는 오름만 무려 350개가 있다. 제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오름들은 제주여행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요소이지만, 31가지 아이스크림 중에 하나를 고르기도 벅찬 누군가는 350개의 선택지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질 것이다. ‘어디를 먼저 가봐야 할까?’ 이에 대한 제주도의 답은 다랑쉬 오름이다. 식당 메뉴판 맨 위에 사장님 추천 메뉴를 올려두듯, 제주도는 다랑쉬 오름을 ‘오름 랜드마크’로 지정해 오름 여행 1번지로 삼았다.
비자림로를 가로질러 마을을 몇 개를 지나면, 탁 트인 벌판에 여러 오름들이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다. 다랑쉬 오름을 필두로 아끈 다랑쉬 오름, 용눈이 오름, 은월봉 등이 모여 있는 이곳은, ‘오름의 왕국’ 제주의 ‘오름의 수도’와도 같은 곳이다.
수도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역시 ‘오름의 여왕’ 다랑쉬 오름이다. 겨울에 찾아갔음에도 다랑쉬 오름은 3개의 색으로 둘러싸여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아래쪽에서부터 불그스름한 삼나무가 오름을 한 바퀴 두르고, 그 위로 황금빛 억새와 초록빛 곰솔이 어우러져 한 겨울에도 빛을 발한다.
다랑쉬 오름은 정상의 깊은 분화구가 특징인데, 그 깊이는 한라산 백록담과 맞먹는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다랑쉬 오름은 정상까지 오르는데 절반, 정상에서 분화구 둘레를 한 바퀴 도는데 절반이 걸린다.
오름 입구에서는 높은 삼나무가 오름 궁전의 문지기처럼 줄지어 있더니, 첫 오르막을 넘기자 억새가 가득한 둘레길이 나온다. 산을 가로질러 올라가는 일반적인 등산로들과는 달리, 오름을 부드럽게 감아 오르는 이 둘레길은 한편에는 억새 가득한 다랑쉬를, 다른 한편에 탁 트인 푸른 하늘을 끼고 올라가게 된다.
중간중간 마련된 쉼터는, 쉬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점점 달라지는 제주의 전경을 보기 위해서도 머물러 갈 필요가 있다. 바로 앞으로는 ‘작은 다랑쉬오름’이라는 의미의 아끈다랑쉬오름이 보이고, 저 멀리로 성산일출봉, 그리고 우도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평평한 밭이 쭈욱 펼쳐져 있는 가운데, 시야를 가리는 건물은 하나도 없고 군데군데 오름들만 솟아있다. 이것이 분명 지구 표면의 본래적인 모습일 텐데, 왜인지 빌딩 숲이 없는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몇 개의 오름들만이 군데군데 뭉툭하게 솟아있는 풍경을 보자니,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밭에서 풀이 자라고,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것을 보니 이곳은 분명 지구가 맞다. 어쩌면 인간은 빌딩으로 분칠 한 지구 표면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정작 땅과 산만이 있는 진짜 지구의 민낯을 보며 낯섦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닐까.
산을 올라갈수록 아끈 다랑쉬오름이 점점 작아지는 가운데,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다랑쉬오름은 분화구까지 오르는 데 절반, 분화구를 한 바퀴 도는데 절반이기 때문에 분화구 둘레를 한 바퀴마저 돌아보아야만 다랑쉬 오름을 완전히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분화구 둘레길을 따라 가장 높은 지대까지 올라갈 때만 해도, 다랑쉬의 분화구는 곰솔에 가려져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다. 분화구 둘레길의 절반 지점을 지나고 나서야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이 조금씩 줄어들게 되고, 드디어 분화구 속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듣던 대로 깊디깊은 분화구가 걸어 다니는 내내 눈을 사로잡는다. 한라산을 올랐을 적의 기억을 어렴풋이 되돌려보니, 얼추 분화구의 깊이가 비슷한 것 같다. 두 분화구에 차이가 있다면, 고도가 다르기 때문에 겨울 풍경이 다르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겨울의 백록담은 눈과 얼음으로 가득 찬 순백의 분화구인 반면, 이곳 다랑쉬오름은 그 정도로 고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눈이 얼어있지는 않다. 대신 한 해 동안 여문 초목들이 잔잔한 황금빛을 내며 분화구에 융단을 깔아 준다. 한편 조금 전까지 시야를 가렸던 곰솔은, 이제는 푸른빛 장식이 되어주며 분화구 구석구석의 색감을 채워준다. 그렇기에 다랑쉬오름의 분화구는 겨울임에도 생명력이 남아있다. 분화구를 빙빙 돌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지만, 이 한기는 금빛 초목이 가진 온화한 색감, 푹신한 촉감과 대비되면서 다랑쉬오름의 따뜻함을 더욱 부각해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