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째 외출 : 10km의 풍경화

제주국제평화마라톤

by 김형우

2019년 3월 31일. 처음으로 10km 마라톤 공식 대회에 도전하였다. 제주 국제 평화마라톤대회가 열리는 한림체육관에서는, 매우 이른 아침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달리기를 위해 분주히 몸을 풀고 있었다. 아침식사 대신 에너지바를 한 조각 베어 물고 나 역시 그 인파 속에서 틈틈이 몸을 풀어둔다.

티셔츠에 내 번호판을 달고, 신발에는 기록 측정용 페이퍼를 달아둔다. 평소 축구를 즐기며 쌓아둔 체력에 대한 자신감과 동시에, 10km라는 숫자의 막연함, 게을렀던 연습량이 주는 불안감이 공존한다. 애초에 목표는 완주하는 것이었으니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면서도, 기왕에 하는 거 좋은 기록을 가져갔으면 하는 욕심도 생겨난다.

풀코스, 하프코스를 달리는 주자들을 먼저 보내고, 드디어 땅! 10km 코스 주자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부드럽게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기 시작한다. 한림 체육관에서 나온 후에도 초반 몇 분은 선두그룹들과 엇비슷하게 달려 나갔다. 근데, 어라, 생각보다 몸이 가볍지가 않다. 체력이 없다기보다는 리듬이 안 맞는 느낌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달릴 수밖에.

호흡이 제 자리를 찾을 때쯤, 슬슬 다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달리기라 그런지 정강이 근육이 저릿한 느낌이다. 최대한 신경 써서 한 발짝 한 발짝을 디뎌보지만 나아지지 않는다. 내 몸이지만 정말 가지가지한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었다.

시작한 지 7-8분쯤 지났을까, 2.5km 돌파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왔다. 이제야 1/4이라니,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 그래도 슬슬 호흡도 다리도 적응을 마치고 다 괜찮아지기 시작해, 즐거운 마음으로 달리던 참이었다. 마침 2.5km 지점은 옹포 사거리에서부터 금능해수욕장까지이다. 어릴 적 유년의 생활공간이었던 곳이고, 매해 여름의 추억이 담긴 길이었다. 어릴 적의 심부름 길이었고 명절 세배 길이었던 옹포리 거리를 여유롭게 지나갔다. 금능해수욕장 방향으로 달리면서는 저 멀리 보이는 비양도를 따라 바닷가 러닝의 낭만을 가지려 했지만, 거센 바닷바람이 얼굴을 끊임없이 때려댔다. 바람을 맞으며 힘겹게 달려가지만 5km 반환점은 아직도 요원하다.

5km가 이렇게 긴 길이였나, 하던 참에, 반대편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반환점이다. 반을 넘은 것만으로 완주에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이제 남은 건 여태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힘이 생겨난다. 하나 이런 흐름도 잠시, 마지막 2.5km 구간은 처절한 정신력 싸움이었다. 군생활도 병장 때가 시간이 가장 느리게 흐르듯이, 달리기를 할 때도 마지막 몇 킬로가 가장 길게 느껴졌다. 체력은 빠지고 있고, 바닷바람은 계속 정신없이 얼굴을 때리고, 발가락도 아프다. 정신력을 유지하며 속으로 ‘거의 다 왔다’는 말을 되새김질한다.

드디어 첫출발장소인 한림체육관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남은 힘을 다 써버리고자 체육관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골인. 기록은 딱 50분이 나왔다. 첫 대회 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기념 메달을 받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잠시나마 나만의 올림픽에서 메달리스트가 되어보았다.

잠시 휴식을 갖고 체육관을 나오자, 조금 전 내가 그랬듯 완주를 앞두고 마지막 힘을 내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로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방금 달릴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완주를 마치고 나니 비로소 벚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벚꽃길 사이를 달려가는 풍경이 참 멋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뛰어온 길을 다시 되감기 해 본다.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길이었지만, 뛰는 순간만큼은 참 다르게 느껴졌던 길이었다. 이게 달리기의 매력이 아닐까. 풍경을 느긋하게, 진득하게 음미하는 ‘걷기’와 달리, '달리기'를 통해서는 풍경을 빠르게 스케치하듯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만큼이나 빠르게 그려지는 풍경은, 걸을 때와는 또 다른 인상을 남겨준다. 처음 달려본 사람 치고는 꽤나 거창한 감상이지만, 언젠가 새로운 풍경 속에서도 이런 스케치를 다시 그려보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다.

20190331_103654.jpg 완주를 마치고 나니 비로소 벚꽃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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