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외출 : 작은 섬에서 보이는 것

가파도

by 김형우

제주의 ‘섬 속의 섬’이라고 하면 우도를 많이 떠올리겠지만, 제주섬 주변으로는 우도뿐만 아니라 비양도, 마라도, 추자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여럿 있다. 각 섬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섬을 꼽으라면 바로 가파도이다.


매년 4월 열리는 청보리축제 기간 동안, 서귀포시 남서쪽에 있는 운진항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이틀짜리 축제로 시작했던 가파도 청보리 축제는 점차 인기를 얻으며 매해 기간을 늘려나갔고, 이제는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의 긴 기간 동안 열리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운진항과 가파도를 오가는 배편이 증편되어 보다 수월하게 섬에 출입할 수 있다.


알록달록 장식한 배가 가파도 출입객들을 실어 나른다. 15분 남짓한 항해가 지루하지 않도록 배 안에서는 가파도 소개 영상이 상영되고, 외부 갑판에는 수려한 경치가 마련되어 있다. 생각보다 금세 섬에 도착하니 펄럭이는 축제 깃발이 섬의 활기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선착장에서 조금 걸어 나와 처음 마주하게 되는 건 ‘가파도 터미널’ 건물이다. 작은 섬의 시골마을에서는 보기 힘들법한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가진 이 건물은, 현대카드가 제주도와 손잡고 진행하는 가파도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가파도 프로젝트는 가파도를 생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섬으로 만든다는 목표 하에 시작된 프로젝트이다. ‘지키기 위한 변화’라는 모토에 걸맞게 가파도 프로젝트는 눈에 잘 띄면서도 너무 요란하지 않게 주민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가파도 터미널을 시작으로, 섬 구석구석에서 가파도 프로젝트를 확인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섬 구석구석을 모두 누벼보고 싶었지만, 늘 그렇듯 외출 복귀를 염두에 두어야 했기에 섬을 최대한 빠르게 돌아보고자 자전거 대여를 하였다. 단돈 5천 원을 주고 빌린 자전거로 신나게 달리며 봄기운을 만끽하였고, 잔잔하게 물결치는 해안가의 풍경을 만끽하였다. 정말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에 아름다운 풍경이 더해지니 벌써부터 기분이 들뜨게 된다. 중간에 난 골목길을 통해 섬의 중심으로 들어가니, 안내책자에서 강조하던 소망 전망대가 저 멀리 보인다.


드넓게 펼쳐진 청보리 밭과 어김없이 피어있는 유채꽃 밭 사잇길을 지나 소망 전망대에 다다르니, 여기저기 포토존이 눈에 들어온다. 그다지 높지 않은 전망대이지만, 애초에 마을 전체가 평평하고 낮은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는 없다. 푸른 바닷가와 넓게 펼쳐진 청보리밭, 그리고 저 멀리 한라산과 산방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반대쪽으로는 풍력 발전소가 낮은 마을 속에서 홀로 우뚝 서있었는데, 청보리밭 풍경과 나름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풍력발전기는 가파도의 주된 에너지원이다. 가파도는 ‘탄소 없는 섬’을 목표로 풍력과 태양력 등 친환경 에너지만으로 섬을 움직이고자 시도하는 중이다.

가파도는 탄소제로 섬을 목표로 풍력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섬 중심부로 들어가 청보리 밭을 따라가다 보니, 마을 안쪽의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파초등학교를 지나면 해물짬뽕을 파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길이 나오고, 간간히 작은 공방들과 전시관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마을을 가로질러 쭉 내려가니, 다시 바다가 나온다. 포구 옆의 회색빛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가파도 어업조합 건물, 이것도 가파도 프로젝트의 건물이다. 깔끔한 식당에서는 여러 특색 있는 음식들을 팔고 있었는데, 간식 삼아 청보리 핫도그를 하나 사서 먹어보았다. 맛이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섬마을 바닷가에서 먹는 핫도그라는 사실이 왠지 모를 특별함을 만들어준다. 식당 옆 건물은 어민들의 업무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어망 작업장에서는 그물망 작업이 한창이었고, 해녀불턱에는 해녀들의 생활공간이 구성되어 있었다.

가파도 어업조합 건물에서는 해녀불턱이 현대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다시 페달을 밟고 동쪽으로 향하니, 가파도 프로젝트의 메인 건물인 AiR(Artist in Residence)가 보였다. 이곳은 가파도에 머무르는 예술가들의 숙소와 작업공간이다. 예술가들의 개인 생활공간이라 출입은 제한되어 있으나, 전시관과 전망대는 대중에 개방되어 있었다. 예술가들이 섬에서 살아가며 받은 영감들이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어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망대에선, 앞서 올랐던 소망 전망대와는 다른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소망 전망대가 섬의 중심부에서 주변의 낮게 깔린 풍경을 보는 것이라면, AiR의 전망대는 섬의 끝자락에서 섬 중심부를 향해 바라보게 된다. 바다, 지붕 낮은 집, 풍력발전소, 청보리밭까지. 가파도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의 풍경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AiR)는 섬의 새로운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AiR 전망대를 내려와서는 직접 청보리 밭 사이로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사방으로 푸른빛의 보리와 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낮은 돌담이 밭의 테두리를 그어주고 있었다. 흔히 제주를 상징하는 색깔로 감귤의 주황색을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제주의 밭에서 볼 수 있는 녹색 풀과 흑색 돌의 색채조합 역시 가장 제주스러운 풍경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가파도의 청보리밭은 그러한 녹과 흑의 조합에서 또 다른 변주를 만들어내며 제주 본섬과 구분되는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누빈 가파도에서는 자연과 문명의 공존에 대해, 그리고 지방 마을의 발전 방향에 대한 고민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문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섬 스스로 문명의 동력을 새로이 찾아가며 탄소제로의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가파도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의 전통과 특색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단장해 나가고 있었다.

청보리, 밀, 돌담, 그리고 그 뒤로 바다, 산방산, 한라산이 보인다.

가파도는 몇 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이지만, 이 섬이 보여주는 세상은 무한했다. 빌딩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도시와 달리, 이곳에서 나의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는 없었다. 나는 이 섬의 끝까지, 그리고 그다음의 바다까지,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섬 사이로 잘 닦여진 길은 섬 이곳저곳을 누빌 수 있게 해 주었고, 그 속에서 다채로운 풍경들이 나타나며 작은 섬을 더 넓은 공간으로 인식하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가파도라는 공간은, 겉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존재가 사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대한민국 지도, 아니 그전에 제주도 지도를 펼쳐보아도 가파도라는 섬은 무척이나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섬은, 밖으로는 누구보다도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고 안으로는 골목 마다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그리고 있었다. 하늘 끝까지 닿는 빌딩도, 끊임없이 반짝이는 조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 화려함은 오히려 섬이 가진 잠재력을 가릴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보여줄지’보다는, ‘무엇을 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현재 나의 모습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상관없다. 또 화려함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어느 곳을 바라보고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내 세계의 크기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가파도에서의 세 시간은, 바로 그런 가능성을 내게 일깨워 주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두 번째 외출 : 녹색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