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오름
한라산 국립공원에는 길이와 난이도가 다른 총 7개의 등산코스가 있으며, 계절에 따라서도 풍경이 달라진다. 일곱 개의 코스와 네 개의 계절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경관을 즐길 수 있다. 흔히 한라산 등산이라고 하면 정상인 백록담을 찍는 것을 먼저 상상하겠지만, 한라산 구석구석에는 백록담만큼이나 아름다운 경관들이 비밀처럼 숨겨져 있다. 산정호수를 품고 있는 사라오름 역시 그중 하나이다.
사라오름은 한라산 동쪽 사면부에 위치한 오름으로, 제주에서 가장 높은 오름이다. 한라산 속에 위치한 사라오름을 찾아가기 위해선 한라산 탐방로인 성판악 코스를 올라야 한다. 백록담 정복을 목표로 하는 등산객들은 새벽부터 출발해야 입산통제가 시작되기 전에 정상에 도달할 수 있지만, 사라오름을 목표로 한다면 보다 느긋하게 출발해도 충분하다.
여름의 아침 햇살을 받은 한라산의 숲길은 녹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항상 겨울에만 성판악 코스를 찾았던 나에겐 푸르른 숲길마저 새롭게 느껴졌다. 산이 주는 특유의 선선한 포근함이 여름의 열기를 달래주고 있었다.
성판악 코스는 백록담까지 4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는 코스이고, 사라오름은 코스의 정 중간에 위치해있다. 그러니까 대략 2시간가량 소요되는 셈이다. 산길은 완만하기에 등반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니, 120분 동안 부지런히 다리만 움직이면 된다. 물론 그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행히 한라산의 풍경은 2시간 걷기의 지루함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녹음이 짙은 나무들 아래로 이끼 낀 돌들이 보인다. 바위 틈새로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어 며칠 전 비가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사라 오름 호수는 날씨 조건에 따라 수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운이 안 좋으면 호수를 못 볼 수도 있는데, 산길 속 개울들을 보니 다행히 그런 일은 없을 듯하다.
휴게소를 지나 40여분을 더 올라가니, 사라오름 전망대를 가리키는 표지판과 함께 갈림길이 나온다. 그대로 쭉 직진하면 백록담까지 가는 길이고, 사라오름을 가기 위해선 표지판을 따라 계단을 올라야 한다.
경사진 계단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 보니, 드디어 사라오름 호수 풍경이 펼쳐진다. 엊그제 비가 많이 왔던 것에 비해 수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물이 꽤 고여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평상에 앉아 천천히 호수를 감상해본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 호수 표면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초점을 잡기 위해 잠시 동안 화면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카메라 렌즈처럼, 사라오름 호수 표면 역시 얕은 물결이 이어지며 산의 풍경이 담길 듯 말듯하고 있었다. 렌즈 표면을 닦아보려 입김을 내는 것인지, 갑자기 물안개가 피어나 호수를 뒤덮는다. 안개가 가린 호수에는 어두운 그림자만이 비추고, 풍경에는 신비로움이 더해진다. 몇 분후 물안개는 잦아들고, 호수 표면의 떨림도 잠잠해진다.
호수에 비친 주위 풍경을 바라보며, 호수 둘레를 따라 걸어 들어간다. 그렇게 호수 반대편에 도착하면, 다시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이 나온다. 구름과 안개가 많이 낀 탓에 광활한 풍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안개 낀 한라산을 내려다본다는 것 역시 나름 운치 있는 구경이었다. 전망대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니 호수의 렌즈는 초점 조절을 끝내고 산의 풍경을 그대로 찍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