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를 계획한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20년 전 이 집으로 이사와, 17살 때부터 언니와 방을 바꿔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벌써 10년도 넘게 똑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학생 때야 인테리어를 새로 하려는 생각자체가 없었고 성인이 되고서는 언젠가 집을 떠나겠지 생각하며 방을 방치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이쁜 방에서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지만 한편으론 이 방이 사라지는 게 아쉬웠다.
어릴 때부터 사용한 방이라 유치한 곰돌이 벽지가 그대로 붙어있었지만 이 방을 바꾸면 예전을 기억할 수 있는 게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10분짜리의 단편영화를 집에서 촬영했던 건 집을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비워낼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방에 있던 짐을 버리려니 아직 미련이 많이 남아있었다.
특히나 초등학생 시절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그랬다. 이사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보석함, 아빠가 화이트데이에 사다 줬던 사탕바구니,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고장난 사진기. 모두 낡고 고장나버린 것들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물건들을 버리지 못했다. 물건이라기보다 어린 시절 자체로 느껴져 이것들과 헤어질 준비가 안된 것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당장 쓸 물건이 아닌 것들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작년, 나는 가족들과 많은 과거들을 바로 잡았다. 아주 오래전 나도 모르게 트라우마로 남았던 사건이 있었는데 작년 가족 여행이 트리거가 되어 다시 그 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그걸 마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안해져 제대로 직면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상담선생님은 오히려 그 기억을 제대로 꺼내보라고 용기를 주셨다. 어쩌면 그 기억을 제대로 떠올린 적이 없기에 더 불안했을 거라는 말에 혼자 추측하는 대신 사실확인을 해보라고 하셨다.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도 나는 아직 그 기억이 상처로 남았던 열한살에 머물러있었다는 걸 조금씩 깨달았다. 가족들을 대하는 방식 역시 나는 그때 그대로 머물러있었고 가족들 모두 미성숙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가족들의 화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보자 마음먹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로 진실을 직면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상담선생님께서 내면의 힘이 있다는 말을 해줘도 나를 믿는다기보다 선생님을 믿기 때문에 내 힘을 믿어보려는 식이였다.
하지만 결국은 그 본질적인 기억을 건드리면서 내가 힘들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정체성처럼 지니고 있었던 불안감과 내 안의 해결되지 못한 분노, 우울은 모두 그때의 기억과 그 언저리의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게 됐다. 나는 하나하나 바로 잡았다. 화를 내고 싶은 일에 화를 냈고 울고 싶어지면 실컷 울었다. 이전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것 자체가 무서워서 차라리 남을 이해해버리고 내 상처를 묵인하지 않았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차라리 모든 감정을 제대로 느끼니 해결할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견디기 어려워서 서두르기보다는 내가 해결해 볼 준비가 됐을 때 움직였다. 덕분에 상대가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해결하고 싶다는 내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비난하는 대신 대화로 이야기해보려고 많이 노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거나 나를 비난하는 말은 그냥 넘겨버리지 않고 제대로 방어하며 나를 지켰다.
힘들었던 하반기를 지나 가족들과의 모든 대화를 마쳤을 때 해방감을 느꼈다. 가족들하고만 있으면 스스로 예민한 사람 취급하며 위축되고, 잘못도 없이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했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방 안에서 모든 감정을 혼자 삭혀냈던 어린날들을 내가 힘껏 달래줬다. 가족들이 바뀌어야만 행복해질 거라는 막연한 바람에서 벗어나 내가 이 모든 걸 해냈다는 게 무엇보다 뿌듯했다.
그 해방감은 짐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도록 만들어줬다. 신기하게도 가족들과의 해묵은 갈등이 풀어지자 짐을 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이 담긴 방도 시원하게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상자를 버리지 못한 건, 그 물건들이 행복했던 기억만 담고 있는 상징 같은 거라 이것마저 사라지면 맘껏 그리워할 대상이 사라질까봐 불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깨달았다. 내가 머물러야 할 건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11살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이뤄낼 수 있는 29살이 되었다는 것. 지금의 나는 현재도 미래도 모두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내게 그만큼의 힘이 있다는 것.
새해가 되고서 인테리어를 최우선순위로 둔 건 그런 마음가짐을 바로 실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구부터 다 바꿔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할 게 많지만 이 역시, 비움의 미학을 담아 너무 많은 고민은 덜어내고 공간을 잘 살릴 수 있는 방식에 집중해 인테리어를 계획했다. 드디어 오늘 20년 묵은 책상과 옷장, 책장을 처리했고 곧 새로운 옷장이 배송될 예정이다.
내게 비워낸다는 건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과거대로 받아들이고 그걸 비워내야만 새로운 걸 들일 수 있다. 아직 내 방은 오래된 걸 비워낸 단계에 머물러있지만 새로운 가구들과 함께 달라지는 방을 추가로 기록하며 변화된 스물아홉을 나도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