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단단하게, 나만의 속도로

오늘도 나답게 살아가기(6)

by 녕이담

'어린이병원에 다니는 성인 환자'


어릴 때부터 다닌 병원에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개개인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내가 가진 질환이 다른 이보다 더 '특수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장질환은 참 오묘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질환이 아니다.

희귀 난치 질환임에도, 적어도 외관상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여 상대적으로 가벼이 보게 되는 부분들이 꽤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이것이 복인지 화인지 매번 고민을 선사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쩌다 보니 1번 타자로 걸어 나가는 이 길에서 뒤를 잇는 2번, 3번 타자들을 만나게 되고 좁은 우물에서 발버둥 치던 나의 모습은 어느새 그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됨이 엿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느껴 온 절망과 아득함.

그것이 이 아이들에게도 다가오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되면서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만난 작은 빛들이 아이들에게도 찾아와주길 바라는 마음에 조심스레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커피 한잔을 계기로.

*

이미 스무 살이 넘어 혼자 병원을 다니는 나와 달리 2,3,4번... 들은 적어도 10살 이상 어린 친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세상은 부모님이 보여주는 세상이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마다 어떤 상황인지 전부 알지 못했지만 같은 질환으로 오래 병원을 다니면서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면 관심이 가게 되었다. 아이도 엄마도 참 힘들겠다고 짐작했다.


우연히 같은 병실이 된 것을 계기로, 아이 어머님께 선물 받은 커피 머신으로 뽑은 커피 한 잔을 건넨 적이 있었다.

태연히 건네던 것과는 달리 마음속으로는 생각이 참 많았었다.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맛이 없으면 어쩌지?'

'취향에 안 맞으시면 어떡하지?'


걱정했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나 건네진 커피 한잔을 받아 든 어머님은 뜻밖이셨는지 잠시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셨고 얼굴에 망설임과 머뭇거림이 느껴졌지만 결국 '잘 마실게' 라고 하시며 받아 드셨다.


그 후 며칠 동안 더 커피를 건네었던 것 같다.


계기는 관심이었지만, 그마저 별 큰 뜻이 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지루한 병실의 하루 속에서 단 한순간의 평온으로 남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어릴 때 수술 후 금식을 하며 운동을 하다 쉴 때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 마시던 내 엄마와 겹쳐 보여서. 병원 특유의 냄새가 가득하던 곳에 퍼지던 그때의 커피 향기가 어린 마음에도 잠시 숨 쉴 틈을 주었다고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한 나의 마음이 전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매일 반복되는 병원 생활의 하루 속 작은 위안이 되었기를.


그날 이후 그 친구와 어머님 모두와 인연을 이어오고 내 기억에선 희미해진 그 일.

어머님께서는 잊히지 않는 순간이 되셨는지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하시곤 한다.

삶의 힘든 순간 커피 한잔조차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그때.

친분이 없던 의외의 인물에게 건네받은 커피 한잔은 사실 취향에 맞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쩐지 그날 이후로 퀴퀴하고 우울하게만 느껴지던 병실에 퍼지는 커피 향기를 기대하게 되셨다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향기에서 전해지는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느낌이 맛이 없던 커피가 점점 맛이 느껴지고 나중에는 나와 나누는 커피 한잔의 시간을 즐기실 수 있을 만큼.


그때의 계기가 이어져 지금은 커피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 ‘중독 수준까지 되어버렸어!’

라며 하시는 말에는 늘 웃음이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련한 일화가 되어버렸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삶을 이어가기도 힘들었던 시간들로 가득했던 시기가 지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함께 마주보고 웃으면서 커피 한잔을 마신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하고 크게 웃을 수 있게 된 오늘이 오기까지 우리는 몇 잔의 커피가 쌓였을까.


나도 그들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멈추어 버린 시간이 찾아오는 순간이 존재하게 되는 듯하다.

시간에 영영 멈추어 있을 것 같던 우리도 결국엔 이렇게 다시 웃을 수 있도록 시간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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