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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쿙가 Feb 07. 2022

복에 겨운 소리 하지 마-라

자리와 안정감

네가 공감력을 상실했구나?

나에게는 독일에서 오랫동안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융진은 한국에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당시에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었기 때문에 융진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융진이 독일로 가 어학시험을 보고 대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면서 몇 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융진의 친구들은 다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거나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학생 때가 좋은 거라지만 융진은 대학교에 아직 입학을 못 했으니 학생도 아니었고 돈을 버는 직장인도 아닌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융진은 몇 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에게 심리적으로 힘들다고 말했다가 이런 소리를 들었다. 


남들은 가고 싶어도 돈 없어서 못 가는 게 유학인데
복에 겨운 소리 하지 마-라-

그 말은 장난 투였지만 그 사람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융진은 별다른 대꾸를 안 했던 것 같다. 난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 사람에게 찾아가 닥치라고 하고 싶다. 가서 입이라도 때려주고 싶은데 그 공감력 상실한 멍청이가 바로 나라서 자책만 했다. 그때의 나는 융진이 스스로 유학길에 오를 선택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 부러웠다.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긴 했지만 정확히 뭐가 힘든 건지 몰라서 별로 크게 와닿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진짜 복에 겨웠던 건 그 말을 하던 나였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시기의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교환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인생의 모든 복을 다 끌어 모았나 싶을 만큼 좋은 일들이 많았다. 그때 생활을 요약하자면, 독일 오기 전에 학교에서 배정받은 기숙사가 있었고 튜터가 복잡한 행정 업무를 다 해결해 줬다. 대학에는 수업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또래인지 또라이들이 한가득했다. 국적이 다른 사람들과 독일어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했고 그들과 함께 매일 파티를 열어 술에 취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첫 해외 생활은 모든 게 낯선 만큼 새롭게 느껴졌다. 좋은 것만 보기에도 바쁜 게 교환학생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매 순간 들떠있었다. 


그래서 그 생활이 해외 생활의 전부인 줄 알았던 거다. 독일에 와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융진이 너무 부러웠다. 당장은 조금 힘들더라도 어쨌든 곧 입학할 거 아닌가. 그럼 교환학생들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졸업하고 독일에서 자리 잡고, 취업하면 다시 신나는 해외 라이프 시작 아닌가. 나는 그런 식으로 유학생과 예비 유학생들의 미래를 무책임하게 그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자리와 안정감

교환학생 이후 나는 한국에 와서 졸업했고 작은 가게에 취업했다. 막상 새 꿈이 생기니 독일이 딱히 그립지 않았다. 내가 좋았던 건 독일이 아니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어도 용서가 되는 신분과 그것에 동참해주는 친구들이었다. 학기가 끝나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니 추억만 가지고 한국에서 내 일을 찾아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못 가 일터에서 잘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다른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몸소 깨닫기 직전까지 말이다. 


첫 실직으로 인해 인생이 공중분해되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내가 있을 자리를 다시 찾아야 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스러움은 취업이 안 돼서 도피 워홀까지 가게 되었을 때 극에 달했다. 워홀 생활은 교환학생 때와는 정반대였다. 처음에는 해외 생활을 일 년 해 봤으니까 워홀도 잘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대학교 울타리 밖에서 본 유럽은 풍경이 사뭇 달랐다. 워홀러에게는 집이 없다. 대학교에서 나오는 튜터도 없다. 기숙사 파티도 없다. 교환학생들은 학기가 끝나고 한국의 대학교에 돌아갈 수 있지만 이미 졸업한 후 취업이 안 돼서 온 도피 워홀러에게는 한국에 가도 돌아갈 자리가 없다. 현지 잡을 구했지만 내 모든 운을 교환학생 때 써 버린 탓일까, 동료들의 괴롭힘과 무시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 존재가 점점 더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자리가 없다는 게 이렇게 위태로운 건 줄 꿈에도 몰랐다. 그게 서러워서 울다가 문득 예전에 융진과 했던 대화가 떠오른 거였다. 융진은 독일에 와서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고 했다. 그 시기를 나는 유학이라고 뭉뚱그렸었는데 사실 그건 유학 준비 기간이었을 뿐이다. 융진은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 몇 년을 버텨야 했던 거다. 우리 둘 다 워홀이나 유학에서 안정감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외국에 왔을 때, 한국에서는 당연했던 자리가 여기에는 없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너무 무서웠다.



여유공간

워홀 이후 나는 해외 생활에 대한 환상이 탈탈 털렸다. 도저히 워홀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유학도 더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에 있는 한국 회사에 이력서를 냈고 취업이 됐다. 일은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 잘 모르겠고 재미없고 힘들다. 하지만 회사라는 자리가 나에게 주는 것, 거기에서 오는 안정감으로 나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내가 졸업 – 실업 – 워홀 – 취업을 거치는 사이에 융진도 대학에 입학했다. 새롭게 적응해 나가느라 바빴던 것 같다. 이제는 융진이 힘들다고 하기도 전에 내 입에서는 ‘와 유학 생활 개 힘들지. 난 유학 안 해. 워홀도 안 할 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무려 오 년 전에 복에 겨운 소리 한다고 뭐라 해서 미안했다고 뒤늦게 사과한다. 그럼 융진은 쿨하게 받아준다. 자기는 학과 잘못 왔다고 하면서 취미로 코딩 공부를 한다. 영어랑 독일어는 수준급이다. 과제와 실습에 치이고 나랑은 팟캐스트까지 하느라 방송 마감에도 치인다.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틈틈이 내 에세이도 읽고 피드백을 준다. 


나는 교환학생으로 일 년, 그리고 직장인으로는 만 이 년째 독일에 살고 있다. 독일 맥주가 맛있고 길거리가 이색적인 건 이젠 너무 사소해졌다. 인터넷은 느려 터졌고 공무원들 일 처리는 엉망진창이다. 그런데도 여기가 살만한 건 이곳이 독일이어서가 아니라, 내게 체류를 보장해주는 일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일터에서 받는 월급으로 월세를 내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맛있는 걸 먹고, 가끔은 친구들을 초대한다. 


이제는 융진도 나도 조금은 노련한 해외 거주자가 되었다. 각자 사는 곳은 서울과 부산만큼 보다 멀지만 우리에게는 예전과 달리 마음에 여유가 있다. 그렇게 생겨난 공간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짜내고, 서로를 웃기려고 애쓰고, 팟캐스트 방송을 하고, 글쓰기 모임을 열면서 서로의 자리를 연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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