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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 Aire Sep 02. 2020

강남아파트 계약의 정석

<제22편> 중소기업 월급쟁이, 강남아파트 투자로 조기은퇴하다

수서까치마을 아파트를 처음 본 지 2년도 훨씬 더 지났다. 아, 배가 아프다. 그 사이에 아파트 시세가 올랐다. 내가 살 때까지만 기다려 주면 좋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한지 KB 시세와 실거래가는 저 멀리 떠나버렸다. 그렇게 까치마을 아파트는 투자 목록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2014년 11월, 급매 물건이 나왔다는 부동산의 연락을 받았다. 시세보다 2,000만원 저렴한 3억 4,000만원이라고 했다. 그래도 2년 전보다는 2,000만원이 오른 금액이었다. 동향 물건임을 고려하면 3,000만원이나 높았다. 하지만 점점 올라가는 실거래 가격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세입자가 살고 있었는데, 매매 잔금 날짜에 맞춰서 이사를 나가겠다고 했다. 전세 시세는 2억이었다. 학군이 좋으니 겨울 방학에 맞춰 전세를 놓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뭔가 딱딱 맞는다. 느낌이 좋다. 내부는 수리가 거의 안된 기본 상태였고, 여기저기 손을 볼 데가 많이 보였다.


좋다. 매수 의사를 밝혔다.




부동산 사장님이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손을 좀 봐야 하는 내부 상태와 빠른 잔금이 가능함을 앞세워 가격 조정을 시도했다. 2,000만원을 깎는 데 성공했다.


이제 3억 2,000만원이다.


기쁨과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전화로도 이 정도 조정이 된다는 건 매도인이 급하다는 뜻이다. 계약서 도장 찍기 전, 매도인과 부동산 사장님 모두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바로 그 정신없는 타이밍에 가격 조정을 시도할 마지막 기회가 한 번은 더 있다는 뜻이다.


얼마 후에 매도인이 도착했다. 이 집을 꼭 팔아야 하는 사정이 있다고 했는데, 추가 조정이 쉽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더 깎아 달라’와 ‘안 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분을 맞추고 장단을 맞춰가면서 낮은 자세로 바짝 엎드려 틈을 찾고 있었다. 동시에 부동산 사장님께는 어떻게 더 좀 해보라고 레이저 눈빛을 쏘고 있었다. 신발장도 오래됐고, 베란다 샷시도 교체해야 할 것 같다며 갖은 핑계를 대며 어렵게 1,000만원을 깎았다.


이제 3억 1,000만원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집주인 눈치를 보니 약간의 여지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물체 하나가 번쩍이며 눈에 들어왔다. 산책하는 길에 부동산 얘기나 한번 들어보려고 잠깐 들렸다고 했는데, 집주인 아주머니는 주머니에서 인감 도장을 꺼내고 있었다. 급해 보였다.  


매도인은 오늘 계약서 쓰고 갈 작정이구나.

홍은동 아파트 계약 때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싸늘하다. 집주인의 차가운 말투가 가슴에 내려와 꽂힌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이 순간, 부동산 사장님 마저 집주인 편으로 돌아선 듯하다. 도와달라는 내 눈빛을 분명히 본 것 같은데 사장님은 정수기 앞에서 믹스 커피만 타고 있다.’


이번에는 내가 써보기로 했다. 최후의 카드이다. 실패하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


“안 되겠다. 자기야, 우리 돈이 없잖아. 그냥 가자. 사장님 시간도 늦었는데 죄송해요.”

“아니 그래도 그렇게 가시면……”

“사모님, 죄송합니다. 집은 참 마음에는 드는데요, 돈이 딱 500만원 부족해서 힘들겠어요. 저희가 신혼부부라서 아직 돈이 그렇게 없거든요. 먼저 일어날게요. 자기도 나와, 집에 가자.”


무심하게 부동산을 나왔다. 뒤통수에 6개의 눈초리가 따갑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계약이 안 되면 나와는 인연이 없는 계약이라고 생각했다. 물건은 또 나올 것이다. 쫄리면 지는 것이다. 사실 화장실을 더 가고 싶기도 했다. 10분쯤 지나니 전화가 왔다.


오빠, 어디야?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해.
사모님께서 계약하자고 하시니깐
빨리 들어와.

10분쯤 시간을 더 끌다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OTP를 꺼냈다. 떨리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마이너스 통장에서 빠르게 계약금을 송금했다.


강남구 수서까치마을 17평, 3억 600만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드디어 강남아파트까지 왔구나. 이제부터가 진짜 투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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