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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16. 2021

가을엔

바쁜 가을, 지금 농촌엔 반짝 농한기다. 참깨도 다 털었고, 고추도 다 따서 잘 말려 빻았다. 녹두도 따서 잘 말려 바쉈다. 이른 들깨도 다 털었다. 씨 뿌리고 모종을 옮긴 무도, 배추도 잘 자라고 있다. 거둬들이는 시기다. 태풍에 떨어진 대추는 못생긴 대로 잘 말렸다. 알밤은 줍고 까서 냉장고에 들어있다. 무화과는 새들이 다 쪼아 먹기 전에 잘 익었을 때 얼른 따야 한다. 길심씨는 새들과의 전쟁을 치른다. 하나, 둘 가을이 잘 갈무리되어 가고 있다.  


여름에는 할 일이 많더니만 지금 이 즈음엔 할 일이 많지 않다. 이렇게 빈둥거리다간 천고마비의 계절에 말띠인 내가 시골에서 살이 쪄서 서울에 올라갈 판이다. 이제 길심씨네서는 논에 벼 베기가 가장 큰일로 남아 있지만 이것도 농협에 맡겼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10월 10일께가 지나 농협에서 벼 베기 날짜를 알려주면 그 바로 전에 논 귀퉁이 부분의 벼만 베어 놓으면 끝이다. 콤바인이 모서리를 돌아야 하니 사람의 손이 들어가는 것이다. 콤바인으로 벼를 베면서 타작이 된 나락은 바로 농협에서 실어 가고 건조하여 수매를 하게 된다. 


가을이 아직 들지 않은 길심씨네는 매일 맛있는 걸 사다 먹고 해 먹는다. 어제는 인근 목포 청호시장에서 전어회 한 접시와 간재미 4마리를 사 왔다. 전어회도 간재미도 성수씨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길심씨는 텃밭에서 깻잎을 따고 나는 부추를 뜯었다. 길심씨네서 먹는 전어회는 특별하다. 깻잎 두어 장을 겹치고 거기에 부추도 한두 뿌리 올리고 밥을 올린다. 그리고 전어회를 올리고 된장, 고추, 마늘, 양파를 올려 잘 여며서 입에 쑤욱 넣어 씹으면 진짜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겠다.


삼겹살 쌈에도 전어회 쌈에도 늘 밥이 들어가야 맛있다고 길심씨는 강조한다. 아니 강요한다. 입맛은 길들이기 나름이지만 먹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나도 길심씨의 입맛에 길들여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자연스레 끼니도 이을 수 있어 더 좋다. 무언가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음식을 보거나 먹게 될 때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엔 호박죽을 쑤어 먹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커다란 백솥에 끓였다. 나는 불을 때고 길심씨는 미리 삶아놓은 동부를 넣어 삶은 호박을 으깨고 빻아놓은 쌀가루를 멍울멍울 굴려서 작은 새알을 만들어 넣었다. 마른 깻대를 넣은 아궁이 불에 자글자글 끓였다. 소금 간을 하고 설탕도 넣었다. 뜨거울 때 땀을 푹 내며 먹어도 맛있고 차갑게 먹어도 맛있다. 내일은 간재미회무침이 기다리고 있다. 입이 호사를 누리니 내 몸은 가늘 하늘 높은 줄은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안다. 먹거리가 더 풍부한 가을엔 말이 아니고 내가 살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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