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타협'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에 머물며...
20160214
세상 사람모두가 그녀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그게 사람들이 했던 얘기였다. 그녀는 선을 위해 싸웠다.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아이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오베는 그녀를 위해 싸웠다.
왜냐하면 그녀를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아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프레드릭 베크만 「오베라는 남자」중
전자책을 구매하며 잊고 있던 책 ‘다시 넘기기’를 해 보았다. 가끔 책장에 꽂혀 있던 것들을 그렇게 무심코 넘기다보면 그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읽혀지기도 했었다. 한 동안 잊고 있었는데, 문득 전자책으로는 한 번도 해 보지 못 했던 것 같아서 해보니 역시 그 순간 눈물지었던 구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베라는 남자’는 보통의 사람이 보았을 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뚝뚝하고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기보다, 그저 타인의 감정을 쉽게 이해하지 못 할 뿐이다. 그리고 이해를 못하는 것에 대해 상대를 탓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사실에 대해 그저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할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오베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평생 동안 그를 쫓아다니는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힘을 앞세워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버리는 ‘톰’이라는 어른. 권력을 앞세워 자신의 집을 빼앗은 정부. 복지를 빙자하여 자신과 아내, 그리고 이웃의 친구 부부를 갈라놓으려고 한 '하얀 셔츠의 남자'. 그것은 그의 인생을 따라다니는 장애물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오베라는 남자’처럼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며, 평생을 부조리한 현실에 둘러싸여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애써 타협하며 산다.
내 스스로에 대한 이해조차 하기 어려운데, 부딪치며 사는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래서 ‘친절’, '배려', ‘타협’ 같은 단어들로 점철된 말들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냥한 단어’를 배경으로 두더라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영원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부딪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 없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선에서.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선에 맞춰서 지내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선에서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상대방과 같지 않음을 느낄 때, 세상의 정해진 선과 내가 견디는 선이 서로 다름을 느낄 때, 우리는 외로움이라는 감정들과 직면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서로에 대한 외로움을 한 평생 견디며 지내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그 단어와 문장들이 얼마나 쓸쓸한 말인지, 지금 이렇게 쓰면서도 기운이 빠진다.
오베라는 남자의 마음과 그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처음에는 무척이나 불편함을 느끼다가 어느새 굳어있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끼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 ‘오베라는 사람’이 마음속 어딘가에 살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책 속의 ‘오베라는 남자’처럼 살기란 너무나 어려워서 눈물짓는 것이다. 책 속의 세상에는 ‘오베라는 남자’ 뿐만 아니라, 파르바네와 같은 ‘좋은 이웃’과 ‘서로를 도와주는 그들’이 사는 착한 세상이니까.
책 속의 ‘오베라는 남자’가 아는 유일한 것. ‘오베라는 남자’에게 전부였던 소냐에 대한 ‘이해’가 나는 참으로 부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소냐를 위해 자신과의 타협은 물론, 세상과의 타협도 하지 않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끝까지 큰 소리로 외치는 그가 나는 참으로 고마웠던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읽고 읽어도 그 구절에서는 기어이 눈물이 고이는 모양이다.
영원한, 혹은 이 순간만큼이라도 이렇게 찾고 있는 ‘완벽한 이해’를 바라며.
세상에게, 사람들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나에게.
요즘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타협'이 많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