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겨울로 가는 그 길에서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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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아가, 혼자 어딜 가는 거야?”
“혼자라서 가는 거야.”
“혼자가 아닌 걸 알잖아.”
재희는 제인이 웃으며 그런 말을 하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곁을 떠날걸 알았다. 몇 번이고, 비슷한 꿈을 꾸었다. 늘 결말은 같았다. 뒷모습뿐인 검은 머리색의 여자가 저 끝에서 기다리고 있고, 제인은 그곳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하얗고 하얀, 때로는 색을 알 수 없는 어떤 장소에 혼자 서 있었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재희는 그곳이 어디인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게 한참을 서 있으면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가만히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그의 시선도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잠에서 깨면 늘 기억에서 지워졌다.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비행 내내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아주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버렸다. 그리고 꿈은 그대로 사라졌다.
몇 년 전에 봤던 풍경 속에 현우가 말했던 그 동네가 있었다. 나란히 단정하게 들어선 주택들은 같은 듯했지만 저마다 분위기가 달랐다. 그중에서도 주택 단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혜숙과 현우의 집은 야트막한 언덕을 돌아서 있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에 티켓을 끊고, 머나먼 거리를 날아왔다. 그리고 한참을 또 달려 여기까지 왔다. 혜숙이 준 주소를 찾아 문 앞에 서 있으니 재희는 선뜻 초인종을 누를 수 없었다. 막상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말 그들을 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재희야!”
망설이던 재희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혜숙이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얼굴에 수건을 두른 채 무언가를 잔뜩 담은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어떻게 온 거야? 아니, 언제 온 거야? 연락을 하지 그랬어. 얼마나 기다린 거야?”
“안 기다렸어요. 방금 왔어요, 방금. 갑자기 온 거라 연락도 못 한 거예요, 죄송해요.”
“아니야, 뭐가 미안해. 이렇게 왔으면 된 거지. 들어가자. 응?”
재희는 갑작스러운 방문을 사과했지만 혜숙은 그저 즐거운 얼굴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당과 정원 그리고 폴딩 도어로 꾸며진 1층의 혜숙의 공방이 보였다. 그 옆으로 난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은 2층의 지붕까지 뚫려 있어 시원한 개방감을 가졌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거실과 주방 사이에 있었다.
“잠깐만. 네 방부터 보여 줘야지. 오느라 피곤하지? 얼른 씻고 같이 저녁 먹자.”
2층으로 올라가니 거실이 내려다 보이는 복도와 여러 개의 방문이 보였다. 계단에서 조금 멀리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나름대로 신경 쓴 건데, 네 취향에 맞는지 모르겠다.”
“마음에 들어요.”
“이 방은 창문 밖에 풍경이 너무 예뻐. 눈이 와도 예쁘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오래 있어. 응?”
“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와 동그란 탁자와 작은 책장, 그리고 개별 욕실과 그 사이에 연결된 드레스룸까지…. 재희의 커다란 집에 있는 수많은 게스트룸이 아니었다.
그곳은 언제든 돌아와 이곳에서 지낼 ‘가족’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림 작업은 좁아서 하기 힘들겠지? 필요하면 아래층 내 공방을 써도 괜찮아.”
“아니요, 충분해요. 이미 충분해요.”
충분했다. 아니, 넘치고 넘쳤다. 이 방에 들어서니 현우와 혜숙의 진심이 느껴졌다. 자신을 생각하며 이 방을 설계하고 꾸미던 두 사람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제인의 죽음 앞에 힘없이 울던 자신을 두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애써 웃던 그들의 표정이 무슨 의미였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재희야, 우리는…. 네가 진짜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
“제인도 그걸 바라지 않을까 생각했어. 지난번에 한국에 왔을 때도 제인이 그런 말을 했었어. 하지만 제인의 의사를 떠나서 우리도 네가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장례식 후에는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괜찮으면….”
“생각…, 해 볼게요. 그런데 지금은 배가 너무 고파요.”
“어머, 그래! 알았어. 씻고 내려와. 얼른 저녁 먹자.”
혜숙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재희는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오래도록 주인 없이 비워져 있던 침대는 이상하게도 온기가 느껴졌다. 외투를 벗고 샤워를 한 재희는 드레스룸에 앉아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었다. 주인이 없었던 방은 가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머뭇거리다가 작은 짐 가방 안에 있던 자신의 물건들을 꺼내 천천히 정리하던 재희가 화장대 아래 서랍을 열었을 때 작은 상자가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작은 상자를 열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재희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 있던 그 마음을 기어이 보고 말았다.
그때 원우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줬던 그 반지는 바래지도 않은 채 여전히 새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그 반지처럼 원우의 마음도 그대로일까,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뻔뻔해….”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 염치도 없지…….
그저 지금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안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나버린 자신을 상처하나 받지 않고 기다려줄 리 없다.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올 리 없다고 생각하고 여기 버려둔 것이 분명하다.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은 것은 그때 가졌던 원우 자신의 소중한 마음까지 버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것이 맞다.
“저녁 먹자!”
아래층에서 들리는 혜숙의 목소리에 재희는 반지를 제자리에 넣어두고 서랍을 닫았다.
“현우 씨한테 연락했어. 기다리기는 늦을 것 같으니까, 우리 먼저 먹자.”
“네.”
“원우는 어제 통화했는데, 내일 한국에 도착할 거야. 아, 네가 왔다고 알려줘야겠다. 집에 잠깐이라도 다녀갈 수 있으면 그러라고 해야겠어.”
“아, 아니요. 괜찮아요. 해외 투어 때문에 바쁘다면서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거리도 멀 텐데, 괜히 저 때문에 오라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면 제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사실 우리도 두 달은 못 봤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가 온건 알려줘야지. 안 그래? 원우도 좋아할 거야.”
재희는 혜숙의 말에 대답이 빨라졌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될 일이었지만, 재희는 밥알이 넘어가지 않았다. 혜숙은 예전과 같은 소녀 같은 표정으로 들떠 있었다.
원우에게 연락을 하는 그녀를 막을 수는 없지만, 그가 이곳으로 오는 건 바라지 않았다. 원우가 많이 바쁘다고 했으니, 여기까지 일부러 올 확률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원우에게 연락해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오라고 할 수도 없으니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많이 조용하지?”
“네. 그래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심심할 것 같았는데, 여기로 이사하고 난 다음에 심심할 틈이 없었어.”
“그래요?”
“이제 재희 네가 같이 있으면 더 좋아질 것 같네.”
저녁을 먹고 나서 찻잔을 들고 잘 정돈된 마당으로 나갔다. 혜숙과 담요를 걸치고 마당에 둔 의자에 앉아 초저녁 별을 보고 있으니 재희는 자신을 찾아와 돈을 요구했던 ‘혈연’이라 말하던 그들이 떠올랐다. 그 장면이 꿈이었나 싶기도 했다.
아니, 사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지금이 진짜 꿈은 아닐까. 눈을 뜨면 다시 제인이 없는 커다란 집에서 혼자 일어나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울게 되는 건 아닐까.
“이제 정말 춥다.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어.”
혜숙이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에 재희는 내일은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혜숙의 다정한 얼굴을 보며 이 지금이 만약 꿈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할 거라고…, 가슴이 벅차서 목이 메일 정도로 행복한 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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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식사 준비를 돕고, 혜숙과 함께 현우의 출근을 배웅했다. 따뜻한 차를 만들어 혜숙과 함께 뒷 산에 올라가 마시기도 하고, 어느 날에는 현우와 예전에 함께 갔던 목공방에 가서 소품을 만들기도 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고, 매일의 날짜를 헤아리는 것도 의미가 없어질 때쯤. 이상하게도 그런 평범하고 고요한 일상에서 그림을 그릴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재희는 어쩌면 그동안 자신이 일상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밭에 가 볼래?”
“뭐가 있는데요?”
“이제 곧 겨울이라 거의 다 수확했는데, 그래도 남아있는 게 있어서 정리 좀 하려고. 젊은 일꾼 있을 때 시켜먹어야지.”
“같이 갈게요.”
산책을 마치고 온 재희가 자연스럽게 2층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으니, 혜숙이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외출 준비를 하며 그런다.
“서울 가게는 완전히 정리하신 거예요?”
“가게는 정리했는데, 일은 정리를 못했어. 그래서 가끔 주문 들어오는 것만 해주고 있지.”
“너무 일찍 은퇴하신 거예요. 솜씨가 아까우시잖아요.”
“그러게, 나는 그 시절에 옷을 만들면서 즐거웠고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까.”
“제가 배울까요?”
“그럴래? 그러기에는 재희 네가 너무 아까운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안 되겠다. 나중에 제인한테 무슨 말을 들으려고.”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 일군 작은 밭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채소들이 몇 종류 있었다. 혜숙의 손길을 따라서 천천히 재희가 거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너편 밭으로 지나가던 동네 주민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더니 묻는다.
“누구예요? 가끔 보던 아들이 아니네?”
“우리 딸, 멀리서 공부하던 딸이 오랜만에 왔어요.”
“어머, 딸도 있었어요? 예쁘네. 엄마 닮았어.”
“그래요?”
엉겁결에 처음 보는 동네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나니, 혜숙이 재희에게 눈을 ‘찡긋’하였다. ‘딸’이라는 그 말에 재희는 활짝 웃기 어려웠다. 미안함이, 고마움이, 쌓이고 쌓여서 너무 무겁기만 했다. 장갑을 낀 손으로 흙을 다독이며 그와 함께 마음도 다독였다.
혜숙이 신세 진 동네 사람들에게 수확물을 나눠주고 오겠다고 말하여 재희는 남은 채소만 들고 먼저 집으로 향했다.
수확한 채소들을 한 손 가득 들고 집으로 돌아오자 못 보던 차가 주택 옆 주차장에 들어와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회색 재킷을 걸친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마당 한편에 서 있었다.
짙은 회색의 짧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현실적이지 않아 보였다. 넓은 어깨는 그 너머로 멀리 보이는 깊은 산의 곡선과 어울려 대비되는 조화를 이루었다.
반짝거리는 햇빛, 빨강과 노랑, 갈색과 초록이 드문드문 어울리는 늦가을 색감의 향연. 새소리조차 잠시 들리지 않고, 느낄 수 있는 소리는 재희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의 울림이었다.
울타리 너머의 계곡 쪽을 바라보며 서 있던 남자가 인기척에 천천히 돌아보았다.
“…, 왔어?”
“…….”
“오랜만이네.”
아니, 그건 땅의 울림이 아니었다. 재희는 지금 자신의 심장소리가 밟고 선 땅을 통해 원우에게 전달될 것 같았다.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데, 아니, 도망이 아니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머리는 엉망이고 온 몸은 얼어붙었다.
“…….”
혹시라도 다시 만난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한국에 온 뒤 혼자서 거울을 보며 몇 번 연습도 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모습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연습을 하면서도 이런 순간이 없기를 바라고 바랬다. 천천히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원우를 보며 재희가 숨을 멈추었다.
분명히,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오랜…….”
거짓말…. 이런 순간이 없기를 바랐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번에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재희가 입을 떼어 인사를 제대로 건네려 하는 순간. 그 짧은 순간에 원우의 손이 재희의 머리 위로 먼저 올라왔다.
“이번에는 네가 찾은 게 아니라, 내가 찾은 거야.”
“…….”
다정한 손길은 천천히 재희의 머리카락에 붙은 작은 낙엽 하나를 떼어내고는 다시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더 천천히 다가선 걸음은 입김이 마주칠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추었다.
길게 뻗은 눈매는 그동안의 시간을 모조리 담아버린 듯 더 깊어져 있었고, 소년의 얇았던 어깨는 어느새 모든 것을 안아줄 수 있는 남자로 변해 있었다.
자신은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이렇게 변해 버린 그에게 그때의 마음이 남아있을까 봐 걱정했던 것은…, 사실은 그러기를 바랐던 자신의 헛된 기대가 아니었을까. 재희는 분명히 무언가 변해 버렸을 자신의 모습이 원우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다.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주한 시선에 움직일 수 없었던 그 눈을 깜박거리는 순간, 누군가의 당연한 마음이 입김처럼 새어 나왔다.
“보고 싶었어.”
그리고 곧 허공으로 흩어졌다. 원우의 마음은 아주 작게 속삭이듯 귓가에 내려앉았고, 재희는 결국 참을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며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그 언젠가, 어린 시절의 아주 잔인했던 자신이 지금의 자신에게 복수하는 것 같았다. 마치, 지금 너만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원우에게 했던 그 많은 말들이 지금 자신에게 이렇게 돌아와 모든 것들을 곤란하게 했다.
“어머! 원우야,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온 거야?”
“가져 갈게 있어서 잠깐 온 거예요. 금방 가야 해요.”
“재희야, 뭐해?”
“아……, 네.”
“오랜만에 보니까, 어색해서 그러니? 우리 같이 밭에 다녀왔어. 이거 재희랑 같이 수확한 건데…. ”
“주세요. 너도 줘, 무겁겠다.”
혜숙이 뒤편에서 나타나자 그제야 두 사람 사이에 멈춰있던 모든 시간과 공기가 다시 흐르는 듯했다.
혜숙에게 다정하게 행동하는 원우는 여전했지만 헤어질 때의 그 소년은 분명히 아니었다. 혜숙과 재희의 손에 있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다가 재희는 떨리는 숨을 겨우 진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다. 겨울은 어느새 문 밖에 와 있었고, 오랜만의 만남은 자연스러움을 가장하여 문 안에 있었다.
재희는 조금 전 속삭이듯 내뱉은 원우의 말이 그저 그 하얀 입김과 같은, 순간의 반가움으로 흩어져 사라지길 바랄 뿐이었다. 곤란한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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