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할러데이, 김주혁이 떠난 자리에
무엇인가 비어 있다는, 무언가 빠져있다는 허전함이 들 때가 있다. 술을 마신다고 빈 자리가 욕조처럼 채워지지는 않고, 시간이 흐른다고 그 기분이 바람처럼 떠나지는 않는다. 사람이 떠난 빈 자리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이란 그렇게 묵직하고, 또 찌꺼기처럼 오래 남아 있다.
메이저리그에 족적을 남긴 투수, 로이 할러데이가 지난 11월 8일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야구만큼이나 사랑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올해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스프링캠프에는 게스트 인스트럭터 (Guest Instructor : 원 포인트 레슨 위주로 가르치는 특별 인스트럭터) 로 참여했고, 여름에는 미국 플로리다 주의 클리어워터 시에 사무실을 내어 야구계에서 새로운 일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인생은 그의 꿈으로만 남고 말았다.
오프시즌에 유명을 달리하는 전-현직 선수들은 매년 있었다. 시즌 중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선수들도 있었다. 우리가 매년 직면하는 슬픔과 안타까움이건만, 할러데이의 죽음은 유독 사람들에게 크게 다가온다. 그가 떠난 자리가 꽤 넓어 보인다. 왜일까.
실력으로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건 기본이다.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단 6명밖에 없는 양대리그 사이영상 수상자이며, 1996년 이후 가장 많은 9이닝 완투 (67회) 경기를 펼친 투수였다. 뿐만 아니라 한 시즌 200이닝을 8번이나 돌파했고, 1900년 이후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역대 21명의 투수 중 한 명이며, 포스트시즌에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2명 중 한 명이다.
*노히트 노런 : 안타 허용 없이 9이닝을 무실점으로 막는 것 (볼넷, 실책으로 인한 출루 제외)
*퍼펙트 게임 : 단 하나의 볼넷과 실책, 안타도 허용하지 않고 9이닝을 무실점으로 막는 것
그러나 비단 실력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건 아니리라. 실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니까 그렇게 빈 자리가 크고, 그리움도 더욱 커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의 인격 때문이었다. <뉴욕 포스트>의 야구 기자인 켄 다비도프는 할러데이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은 그가 같은 팀 선수는 물론 다른 팀 선수들에게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보여준 격이 영원히 타인의 인상에 남아 있기에, 영원한 이별이 더욱 슬프게 느껴진 셈이다.
그는 자신이 못하는 경기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2010년 5월 29일에 생애 첫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던 날에 같은 팀 선수들은 물론, 구단 관계자들에게까지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당시 시계에 새긴 문구는 "우리 팀이 같이 해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2011년 시즌을 앞둔 공식 기자 인터뷰에서 필라델피아의 선발투수 4명이 초청되었다. 할러데이를 포함하여 클리프 리, 로이 오스왈트, 콜 하멜스가 같이 기자 회견을 가지기로 했다. 이 네 명은 판타스틱 4라고 불릴 정도로 그 면면이 화려했다. 그런데할러데이는 구단 직원에게 찾아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조 블랜튼 (당시 팀의 5번째 선발 투수) 이 없으면 인터뷰를 하지 않겠습니다."
주목을 받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4명이지만, 블랜튼 역시 엄연한 선발 투수이기 때문에 같이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게 할러데이의 생각이었다. 보통 인터뷰를 받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주목도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할러데이는 관심받지 못하던 블랜튼을 생각했던 것이다. 웬만한 선수라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할러데이는 그렇게 격이 높고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큰 사람이 떠났으니, 떠난 자리도 커 보일 수밖에.
사실 이러한 죽음이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할러데이가 유명을 달리하기 열흘 전에 배우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한류 스타도 아니었고, 출연하는 영화마다 흥행 돌풍을 이어가는 보증 수표같은 존재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떠난 자리는 같은 연예인들은 물론, 그와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아프게 다가왔다. 빈소에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충격과 슬픔의 감정이 가득했고, 영정 사진으로만 보아야 하는 그의 웃음이 눈물을 자극했다.
그의 격 때문이었다. 그는 늘 촬영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이었고, 동생들을 위해서 예능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망가졌다. "얘는 주변 사람을 너무 생각해서 문제다"라는 소속사 대표의 증언이 그의 인격을 나타내는 부분이 아닐까. 게다가 관객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감정을 억지로 몰입하지 않고 작품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연기 철학이었다.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니까, 단기간에 몰입시키는 것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기억에 남는다. 끼얹는 게 아니라 스며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익숙한 스며듦을 더는 볼 수 없기에 슬픔이 더 오래 간다.
우리가 떠난 이를 기억할 때 떠올리는 것은 그의 외모도 돈도 아니다. 바로 격이다. 사람을 보여주는, 사람의 인상을 나타내는 격이 인생을 대변해준다. 격조 있는 삶이라는 것도, 결국은 주변에 부끄럽지 않은 인격과 함께 한 인생일 것이다. 떠난 이에 대해 물을 때를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냐고 묻지는 않는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그 이름과 함께 남는 것이 그 사람의 격이다. 내 영혼과도 같아 보인다.
떠나간 사람을 되새길 때마다, 과연 스스로의 격은 어떤 지를 한번쯤은 되묻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혹은 나 자신이 보기에 괜찮은 격을 남길 수 있는 지를 질문하곤 한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일깨워줄 수 있을까. 그게 결국은 내가 잘 살고 있냐는 질문과도 통하지 않나 싶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격이 있어야 잘 살았다는 안도감이 생길 것 같다.
내 몸은 지구 어디든 돌아다닌다. 그리고 내가 발자국을 남긴 곳마다 나의 격이 함께 남는다. 누군가는 그 격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결같이 나의 격을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길 것이고, 그 어려움을 인생 내내 짊어져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이다. 몸은 떠나도 격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