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남자
30년도 채 살지 않았으면서, 이번 생은 망했다고 까불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진심이어서, 난 가망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 뭘 해야 할지 아니 뭘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던 시간이었다.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니었고, 그냥 리셋 버튼만 누르고 싶다고. 버튼은 있지도 않은데 아무도 나에게 누를 기회를 주지 않아 불공평하다고 화를 냈다. 매일매일 마음에 풍랑이 일었다.
취직이 됐다고 했다. 긴긴 백수생활에 이젠 눈치가 보였던 거다.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꼬박 두 달을 남산도서관으로 출근했다. 목적지도 없이 집 앞 정류장에서 아무 버스나 올라탄 어느 일요일, '지금 내리실 곳은 남산 도서관입니다.'라는 버스 방송에 충동적으로 내린 것이 발단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주 5일 아침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유난히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마저도 읽히지 않는 날은 사진집이나 화집을 봤다. 점심은 도서관 식당이나 매점에서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었다. 갈 곳, 마음 둘 곳 모두 없었는데, 책을 읽는 동안은, 이제야 내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더 이상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무감각하고 화 잘 내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되던 때였다. 좋아하는 영화도 볼 수 없고 음악도 들을 수 없던 그때, 도서관의 조용한 책들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가 돼주었다. 책을 읽고 6시 정각에 도서관을 나서서 이태원의 집까지 걸어오는 일은 하루 중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점점 잔잔해졌다. 그때 읽었던 책들은 모두 내게 은인이고 각별한 친구다.
지금은 단골이 된 동네 카페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친한 동생과 이태원을 마냥 걷다가 그곳을 발견했다. 마음에 쏙 드는 카페였다. 커피 향이 가득한 카페 내부는 아늑했고 우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서는데 그제야 책꽂이에 빼곡한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만화책부터 인문학 책까지 무심한 듯 엄선돼있는 그 책장에는 주노 디아스의 소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도 있다. 마침 그날따라 고민이 많은 그녀에게 내가 도서관으로 출퇴근하던 때의 일을 털어놓은 후였다. 나는 갑자기 그 책이 너무 반가워, 바로 이 책이라고, 내가 그때 읽고 너무나 좋았던 책이라고 책장을 가리켰다. 그녀는 날렵하게 그 책을 꺼내서 가슴팍에 끌어안고는, 강아지 눈을 하고서 계속 쓰담 쓰담한다. 그리곤 소심하게
"이 책, 혹시 여기서 빌릴 수 있을까요?" 하고 나한테 묻는다. 사장님 인상을 슬쩍 보니, 잘 웃지도 않고 무척 진지한 타입 같았다.
"언니, 저 여기다가 주민등록증도 맡길 수 있어요."
그건 아니지, 그녀의 개인 정보는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언니라고 용기를 내본다.
"저기요. 제가 이태원 사는데요, 이 책 정말 좋아하는데요. 제 친구가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고 해서요. 죄송한데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읽고 바로 반납할게요"
하고 쩔쩔매고 물었더니,
"그러세요 그럼."
바로 간단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웃지도 않고 대답을 하시길래 우리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랬더니 그가,
"제가 얼굴 기억했으니까 다 읽고 가져다주세요."
하고 덧붙인다. 그제야 우리는 신이 나서 "우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말이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진지한 타입이길래 이래도 미소 한번 짓지 않는 걸까. 아무려면 어떠하리. 기분이 좋아서 카페를 나서는데 뒤통수에서 진지한 카페 사장님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린다.
"그 책, 진짜 좋아요."
뒤돌아보니, 사장님이 조금 미소를 지었던가 아니던가.
어쩌면 진지한 사장님도 아무것도 못 느낄 것 같고, 느낄 힘도 없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책을 읽으며 나처럼 팡팡 울었던 기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책을 빌렸던 그녀는 잘 읽고서 바로 반납을 했다고 한다. 감사의 선물로 소국 한 다발을 그 진지한 사장님께 드렸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이게 무슨 꽃인가요? 향이 좋네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