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오늘 새벽 네시 언저리, 저만치 불 켜진 네 이모네 마당을 향해 걸었어.불빛이 인기척을 내고 있지 뭐야.이모는 벌써 절여놓은 배추를 뒤집고 있었나 봐. 아직 어둠이 웅숭그리는 새벽, 자라목처럼 움츠린 채 대문을 나서는데 다행히 날은 푸근해서 선뜩하지않았어.
이모랑 둘이서 간이 잘 죽은 배추는 위로 올려놓고 아직 씩씩한 배추는 소금물 담긴 고무통 아래쪽으로 옮기는 일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끝이 났지.
한숨 더 자야 날이 샐 것 같아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어. 갑자기 무섬증이 드는 거야. 뛰었어. 그런데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쫓아오는 거야.내 맘을 들키면 그 무섬증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서,뒤돌아보지도 못하고 놀라지 않은 척 콧노래를 슬쩍 부르며 빨리 걸었어. 그제야 바람도 발자국소리도 거친 숨소리를 멈췄어. 우습지? 걸어서 겨우 칠팔 분이 될까 말까 하는거리를 냅다 뛰어 오분만에 대문을 여는 순간 느끼는 안도감이라니. 아이처럼 아직도 밤길은 무서워.
그런데 이렇게 우리 둘이 걷는 밤하늘은 그저좋다. 새벽엔 홀로 어둠과 싸우느라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볼 생각도 못했단다. 뭘 보고 집에 왔는지 모르겠어. 머릿속에 온통 형체도 모를 무서운 생각이 눈앞에 있는 사물을 가리고 있었나 봐.
이제야
별을 건너 총총걸어보는구나.
불 꺼진 이 집은 얼마 전까지 치매 걸린 할머니가 혼자 살던 집이었단다. 저기 봐. 마당에 아직 상추가 쌩쌩하게 자라고 있지? 물에 빠진 막내삼촌을 구해준 이가 이 집 넷째 아들이었어.
그리고 여기 는 요새 그런 양반 없다고 외할머니가 말하는 어떤 할아버지가 살고 있어. 언젠가 내가 마주친 얼굴은 무표정한 고집이 엉겨 붙은 느낌의 할아버지였는데, 그분이 글쎄 할머니 기저귀를갈아주며 함께 산다지 뭐야. 얼굴 너머 얼굴이 보일 때까지 함부로 모든 것을 안다고 앞서가면 안 되는 건가 봐. 그 할아버지의 엄마와 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40여 년 전, 이 집 아랫채에서 우리는 주산을 배웠단다.으응, 한참 주산 붐이 일어서 마을까지 선생님들이 오셔서 가르쳐 주셨어. 그때는 동네에 아이들이 많았거든.
겨우 한 사람 걸을 수 있는 길,
산밭을 가로지른 지름길을 걷다
이쿵!
움푹 파인 길에 하마터면 넘어질뻔했어.
뒤에서 너는
조심조심!
하고 외쳤지.
고개 들어 하늘 보고,
이 길을 걷던 열서너 살 무렵 나를 보느라
그만...
이 길엔 뱀딸기가 많아.
빨간 뱀딸기 하나에 속눈썹을하나 뽑았어.
눈썹하나 뽑고 먹어야 뒤탈이 없대서 말이야.
별거 없는 싱게맹게한 맛이었는데 속눈썹하나 뽑아내야 한다는 말이 더 유혹적이지 않았을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고? 그러게 말이야. 간혹 그런 일 있잖아. 지나고 보니 어처구니없지만 모두들 철석같이 믿어버린 일들이.
비 온 날이면 이른 새벽 이 길을 걸었어. 남들이 주어 가기 전에 떨어진 감을 주어와야 했거든. 떫은 땡감을 우려 단감을 만들어 먹었거든.그래서 이 길은 내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길이야. 감잎을 타고 빗물이 내려오는.이젠 감나무도 없지만 이 길을 걸으면 젖은 발가락이 고무신 안에서 미끄덩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코끝엔 비 묻은 초록에 버무려진 공기 냄새가 나.
저 아래 산밭에서 우린 겨울이면 자치기, 술래잡기, 나이 먹기를 하고 놀았어.
같이 놀던 동네아이 실수로 큰삼촌 머리통이 깨져 된장 바르게 된 것도 저 아래 산밭에서 일어난 일이란다.
탱자나무울타리가 있는 저기 가로등 아래,
말아놓은 덕석 위에 졸졸이 앉아 두 손 맞잡고 무릎 굽혀가며 노래 부르던 아이들 머리 위로 별이 떠있었어.
뒷동산 산죽그림자가 달빛에 춤을 추면 굴뚝마다 피어오르던 몽글한 그림자도 바람 끝에 잦아들고,
골목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돌멩이와 나뭇가지와 솔방울은 덩그렇게 산밭에 나뒹굴고,
군불땐 아랫목에서솜이불 덮고 언니와 발장난 하던 밤,
문풍지너머 겨울바람 타고 그때도 저 별이 떠 있었겠지.
함께 걸으니 좋다.
너는 엄마 닮아 도톰한 손이 싫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복스러운 네 손을 잡고 함께 달빛을 타고 별을 총총 건너니 좋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