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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Mar 27. 2023

나는 한때 버마재비였다

놀라지 마시라. 나는 그런 버마재비가 아니다. 짝짓기 후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동종포식 행동을 하는  사마귀가 아니다. 단지  천천히 움직이는 느림보 버마재비였다. 그것도  한때는.


오메, 우리  버마재비  인자 온가-

 아버지는 소먹이 풀이 가득 찬  바지게를  작대기로  받쳐두고  잠시  당산나무 아래  앉아 숨을  돌리고  계셨다. 나는 냇가를 폴짝거리며 뛰어 건너,  마을에서  흘러내려오는  도랑가를 기웃거리며  마을 어귀에  들어서고 있었다.


  당산에 앉으면  멀리 마을 앞을  흐르는 청석강이 보였다. 장마로 큰 물이 져서 돌다리를  건널 수 없을 때  빼고는  거의  이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 다녔다.  마을  밖으로 십여분을  걸어가면 큰  도로와  연결된 다리가 놓여 있었지만,  징검다리를 건너  오일장이나 학교 가는 길이   훨씬  가까웠다.


뭣허고  인자오까이-   

교서  동무들  다  보내고   맨 꼴등으로  온갑서이.

아녀,,, 아버지는  ,,,

학교 끝나고  선생님이랑 시험지  채점하고  교실 정리허고 오는 길이란 말이여.

나는  작대기를  짚고, 허리를  굽힌 채 깔 바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아버지의  을 잡았다.


지금도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장엄하게 버티고 있다. 그리고  푸른 그늘 아래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들은 햇빛을  걸러 바람을  일으키는  느티나무 그늘에서  닷짝걸이(공기놀이)를 했다. 나이먹기 게임을 했다. 남자 어른들은  뜨거운  여름 한 낮이면  더위를 피해  정자에  누워 목침을  베고  짧은 잠을  잤다. 여자 어른들은  밤이나 옥수수를  쪄서 남광주시장에  팔러 나갈 때,  버스를  타기 위해 잠시 머물렀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그 느티나무 아래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마을  어른들 중 흉이 없고  궂은일을 당한 지 않은 사람으로 세명의 제관을 뽑아 당산제를  지냈다.  아버지는 제관이었다. 제관은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해야 했다. 그래서 당산제를 지내기 전  사흘동안 화장실 다녀올 때마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 사흘동안  아버지는  최소한의  음식을  드셨다. 당산을  빙 둘러  두르는  새끼줄도 직접 꼬았다. 보통의 새끼줄은 오른손으로 꼬지만 당산제에는 왼새끼를 꼬았다. 이 모든  행위에 엄마의 뒷설겆이가  있어야 했다. 벗어놓은  옷가지 빨래와  그 밖에  집안일들이 모두  엄마  몫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아버지는 다른 사람일이라면 백방으로 나서는 사람이었다.  


리 동네는 면 소재지 마을을 빼면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광산김 씨 집성촌이었다, 백여 가구가 넘는 집중 다른 성씨는 대여섯 가구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원래 이 동네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처가살이 중이었다.  하나뿐인  외삼촌은 6.25 때 돌아가셨고,  이모는 시집을 갔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집을 짓다 지붕에서 떨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엄마는 혼자 살고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엄마가  친정살이를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딸이  둘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치마라고는  입어본 적이 없었다. 이름도 남자였다. 여자일까 남자일까 의심이 가는 그런 중성적인 이름도 아니었다. 딱 들어도 누구나 남자겠지 생각하는 그런 이름이었다.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만난 친구가 한마디 했다. 방학 중 내가 보낸 편지 봉투를 보고 오빠가 어떤 녀석이냐고 흥분해서 물었다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런 이름을 지어오신 분은 외할머니셨다. 꼭 이번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다짐이 들어있는 귀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세 번째 딸을 낳았다. 외할머니는 갓난아이 쳐다보지도 않았고,  외할머니가 계시는 안방으로 들이지도 않았다. 며느리라면 혹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도 해보련만 친딸에게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외할머니는 당신의 큰 딸이  당신과 닮은 생을 살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외삼촌은 1951년 돌아가셨다, 아니 사라지셨다.

'인민군한테 동원돼서 끌려간 뒤 지리산에서 죽었는지 백아산에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외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외할머니는 아버지도 하지 않던 담배를 피우셨다. 엄마는 생때같은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가슴에 피를 토해내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주 어릴 적, 나는 신기해서  외할머니 허락을 맡고 곰방대에 담배가루를 꾹꾹 눌러 담아 보기도 했다. 그리고 불을 붙이고 입으로 '뻐끔'소리가 나도록 들이마시고 '후욱' 연기를 품어내는 할머니 입모양을 따라 해보기도 했다. 물론 그때쯤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방을 쓰고 있었다. 내 이름 덕분인지 엄마는 내 밑으로 남동생을 둘이나 낳았다. 


뒷집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느그 언니들은 이쁘고, 남동생들은 겁나게 잘 생겨붔는디...

너는 귄있어야-


그렇다. 나는 예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위로 언니 둘과 아래로 남동생 둘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셋째 딸이라는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나는 시집갈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 아니었다. 틈새에 태어난 나는 크게  울어도  안되고  귀찮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수더분하고  튼튼하게  자랐다. 시키지도 않은 부침개를  부쳐  새참으로  내가고, 해 질 녘이면  언니보다  먼저  빗자루를  들고  방청소를 했다. 외할머니  생신이면  버선 한 켤레를 엄마에게  부탁해 장에서  사다 드렸다. 그렇게  셋째 딸은  이쁜 것보다  '귄있'라는  타이틀을  얻어냈다.


언니들과  닮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갸름한 언니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손으로  얼굴 양옆을  가리고  다시  바라보았다. 아니었다. 나는  애초에 언니 얼굴이  될 수 없었다. 나중에  작은  어른이  되어서야 나는  세 번째 딸로  태어나는  순간, 아니  엄마 뱃속에서  딸로  결정되는  순간부터  얌전하게  살아가기로  맘먹은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하루 일이 끝나는 시간쯤이면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드셨다. 그 시간쯤이면  나에게 엄마는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모시러 가면 오지 않던 아버지가 내가 가면 온다는 이유였다.


아버지 집에 가게-

아따, 딸내미가 델러왔구만...근디 느그 아부지 인자 시작했는디?

아버지 집에 가게, 많이 먹었구만...

오메, 느그 아부지가 니 친구냐?

얼렁 가서 저녁 묵게. 가자고 아버지.


동네 어른들이 한잔 더하고 가라거니, 이제 일어서라거니 소리를 뒤로하고 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일어섰다.

우리 집 늘보  버마제비가 델러 왔응게 가야제-


나는 아버지 팔짱을 끼고  막걸리  냄새가  풍기는  아버지를  끄집어 당겼다.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아버지와  느린 버마재비 딸은  골목길을 올랐다. 산밭 울타리에는 탱자나무  하얀 꽃이 피어오르고, 굴뚝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 그렇게  느리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  눈에는 가방을 멘  아이들이  다  지나간 후  제일  늦게야  나타나는  내가  버마재비였을 것이다. 그때도 나는  해찰하는  아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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