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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Apr 03. 2023

벚꽃단상

소풍은 벚꽃이다.


아주 어릴 적 소풍은 벚꽃으로 시작되었다. 아직도 초등학교  가는 길  오른쪽 도로변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다. 그 벚꽃이 보리논을  배경으로  연분홍 번짐을 일으킬 때쯤이면  우리는 소풍을 갔다. 비가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단잠마저 설치게 하던 소풍.

 

엄마, 할머니랑 산책하고 들어왔어요.

천천히 다니지 그랬어. 보행기 밀고 나갔어?

네. 할머니 땀 흘리시던데?

힘들면 앉아있다 다시 걷지 그랬어. 햇볕 좀 쪼이고 들어오지 그랬어?

할머니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아파트 밖으로 한 바퀴만 돌고 왔어요.


몇 년 전까지 어머니가 쓰시던 방을 지금은 엄마가 사용하고 있다. 엄마가 우리 집에 온 후 벚꽃이 두 번째 피고 있다. 작년에는 보행기마저도 밀 수 있는 걸음걸이가 안되어 자동차로 모시고 한 바퀴 돌았다. 며칠 전 꽃구경을 나섰다.  자동차로 한 바퀴 쉽게 끝내려고 했더니 벚꽃은 아직 팥알처럼 영글어 있었다.  벚꽃 군락지 초입에서  맛만 보고 돌아왔다. 그런데  아침 출근길에 보니 어느새 활짝 피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할머니 모시고 산책'을 부탁했더니 짧게나마 보행기를 밀고 다녀온 모양이었다. 비록 굽은 허리와 불편한 걸음이지만 도시락도 없는 엄마의 짧은 소풍이었다.


지금의 할머니는 아이들의 외할머니이다. 엄마는 직장 생활하던 나 대신 큰아이를 키워주셨다. 작은 아이는  시어머니가 키워주셨다.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우리는 함께 살았다. 그래서 큰아이는  친정엄마를  할머니라 불렀고, 작은 아이는  시어머니를  할머니라 불렸다.  아이들에게 '외'자를 붙이는 것은 거리감을 두는 말인 듯 그냥 할머니라 불렀다. 나도 구분해서 사용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도 헛갈리지 않고 잘 알아들었다. 아이들 나이가 스물을 훌쩍 넘긴 지금, 구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만 정확하게 외할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나는 엄마와 어머니로 구분한다.


비록 아파트 주변이지만 꽃구경을 다녀온 엄마를 보고 있자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구경을 좋아하셨다. '어디 가실래요?'라고 물어봐서 '아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집밖으로 나가는 곳은 어느 곳이던지 좋아했다. 술도 한두 잔씩 하시는 '즐거움 많으신 분'이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였다. 벚꽃축제가 시작되면 아침 일찍 어머니는 '싸목싸목 걸어가면 된다'며 삼십여분을 걸어서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그리고 쿵쿵 스피커가 울리는 가장 요란한 곳에 자리를 잡으셨다.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노랫가락에 아기 주먹 같은 벚꽃 뭉텅이가 빵빵 터질 것만 같았다.


 애들은 가라-

 오방색 한복과 분칠로 꽃단장을 한 그녀는 망사스타킹 사이로 사내의 장딴지를 드러낸 채 신명 나게 장구채를 두드리고 있었다. 막걸리 한두 잔에 설익은 관객들의 얼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익은 이야기로 붉게 달구어졌다. 그녀 같은 그는 한번 놀아보자 작정한 듯한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웃음을 와락 잡아당기고 있었다. 엿과 테이프가 팔려나갔다. 어머니는 따가운 햇볕을 종이모자 위에 얹은 채 노랫소리와 웃음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아이들과 나는 오후 늦게 슬슬 걸어서, 때론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그리고 해질 무렵쯤  시끌벅적한 그곳에서 이산가족 상봉하듯 모두 만났다. 아이들에게 벚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아버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몇 장 받아 여기저기 널려있는 군것질거리를 탐하러 나섰다. 솜사탕이나 옥수수콘, 핫도그, 꼬치구이 맛을 보는 것에 재미 들렸다.

 어머니와 우리는 막걸리에 파전이나 조개구이, 주꾸미회를 먹었다. 길거리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아이들의 얼굴을 맡기기도 했다. 그렇게 벚꽃도, 막걸리도, 쌀랑한 밤공기도 취한 채 꽃놀이는 끝나갔다.

그렇게 몇 년을 어머니는 해마다 잊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다. 그날은 소소리바람이 불던 봄이었다.

녀석들이 꽃구경을 가자고 했다. 구암동 살 적부터 벚꽃놀이  잊지 않고 갔더니 이제 꼭 치러야 할 소풍으로 여겼다. 물론 아이들이 생각하는 꽃놀이와 우리들 생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꽃구경이라는 의견일치에 기꺼이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런데 바람이 어찌나 선뜩거리던지 차 안에 앉아 꽃무더기의 흔들림을 창밖으로 내다보았을 뿐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이렇진 않았는데 그날은 휘익 차로 돌았다. 아이들은 군것질거리를 탐하던 그때의 꼬마들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공설운동장 한가운데 앉아 박수를 치던 그때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양쪽 도로변에서 중앙선을 향해 서로 머리를 주억거리고 있는 벚꽃동굴을 한 바퀴는 아쉬워 두 번 돌았다.

아따 구경 한번 잘했다-

남편이 말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어머니는 지나는 바람처럼 무심히  말했다.

사람은 한번 가먼 그만인디 저것은 작년에 가고 올해 또 와도 곱다이-


그리고 어머니는 아흔둘, 벚꽃이 피기 전 세상을 떠나셨다.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많이 댕겨라-

너도 저렇게 손잡고 많이 놀러 댕겨라-


엄마는 텔레비전 속 다정한 부부를 바라보며 내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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