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올 해가 가기 전 꼭 봐야 할 영화

by 키고마

자동 세차장의 쏟아지는 물줄기와 소음을 방패 삼아 주인이는 엄마를 향해 원망도 쏟아내고 소리를 내지르며 한바탕 울음을 터뜨린다. 운전석에서 그런 주인이를 바라보던 엄마는 한 바퀴 더 돌까 물어본다. 그냥 익숙한 일상일 뿐이라는 듯이... 그리고 다른 날 주인이는 맑은 얼굴로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린다. 세상을 향한다.



학교에서 또 친구들 사이에서 주인이는 그저 밝고 씩씩한 학생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성범죄자 출소 논란과 관련해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참여를 거부하면서 친구들과 서먹해지고 갈등이 불거진다. 세계의 또 다른 주인이 들은 과연 이 세계의 주인으로 화합하고 이 땅에 발 디디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성폭행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성폭행 피해자와 그 가족의 치유와 회복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한다.

주인이 가족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엄마는 어린 딸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술에 의지해 달래고 아빠는 자신의 남동생이 딸에게 몹쓸 짓을 하는 동안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시켜 버린다. 주인이의 장난꾸러기 남동생은 마법처럼 가족의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마술에 열중한다. 이게 오로지 개인과 가족이 감내해야 하는 문제인 건가?


세상이 안전하다는 느낌, 즉 기본 신뢰는 생애 초기에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습득되며 이런 신뢰감은 전 생애에 걸쳐 한 사람을 지탱해 준다. 기본신뢰가 무너지는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기본적인 자기감을 잃게 된다고 한다. 외상은 자율성, 주도성, 능력, 정체성, 친밀감과 관련된 과거의 모든 분투를 다시 경험하도록 생존자를 억누른다. 성폭력 외상 사건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신념을 파괴한다.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비판하게 되면서 죄책감과 열등감을 경험한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경험하게 된다. 트라우마로부터 생존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피해자가 자신의 온전한 욕구와 주도성을 발달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스스로가 주인이 되려면, 피해자 정체성을 떨쳐내 버리려면 무엇과 결별해야 하는가?


카메라는 10대 당사자의 시선으로 이 얘기를 그려나가는데 억지스럽지가 않다.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다. 무해한 영화 세계를 구축하면서 10대 여성들의 감성을 디테일하게 잡아내는 윤가은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연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의 연기와 탄탄한 서사 또한 영화에 긴장감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올 한 해는 국내감독이 연출한 영화에 세계적인 할리우드 스타가 출연하기도 했고 화려한 미장센과 은유로 가득한 유명 감독의 영화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올 한 해 본 한국영화 중 가장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큰 고민 없이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을 꼽을 수 있을 거 같다. 진정성과 울림에 있어서 이만한 영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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