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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Dec 17. 2023

엄마의 자리 1

엄마의 말뚝


친정 엄마 그리고 내 이야기. 

이제는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이 되었다.

by 열쇠책방



48년생 75세이신 엄마

내가 기억하는 유치원 때부터 엄마는 늘 일을 해오셨다. 오빠랑 나 어릴 땐 밤을 깎거나 가내수공업 같은 것을 집에서 하셨고 우리가 조금 크자 신발공장으로 미싱일을 가셨다. 우린 참 티 나지 않게 못살았다. 부산 범냇골에 있던 삼화고무 신발공장을 엄마는 오래 다니셨다. 내가 살던 동네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준 경제원이 바로 삼화고무였을 것이다. 친구의 엄마들이 죄다 삼화고무에 다니셨다.



가뜩이나 짧은 점심시간에 엄마는 회사 식당밥을 뒤로하고 집으로 오셔서 점심을 드셨다. 선천적ㆍ후천적으로 드실 수 있는 음식이 한정적이신 엄마는 회사 점심을 먹을 수 없는 분이셨다. 버스비까지 아끼려 하신 엄마는 고개 위에 있는 집까지 20분을 걸어 올라와서 가쁜 숨을 헐떡이며 어린 우리 남매 점심을 챙기셨다.

본인은 물 말아서 후루룩 드셨는데 그야말로 밥이 목구멍으로 넘아가는지 코로 넘어 가는지 모르게 드셨다. 우리에게 100원씩 쥐어주시고 이런저런 당부의 말들을 남기고 다시 종종걸음으로 뛰어내려 가신다. 우리 주지 말고 버스 타지. 그때는 해보지 못한 생각이다.


평일엔 오전 정규방송을 끝으로  tv도 볼 수 없는 그 시절이라서 아마도 심심하고 공허했던 것 같다. 집에 책 같은 것이 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상상력이라도 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엄마를 기다리는 아주 긴 시간들이었다.


 세 살 터울의 오빠는 동생을 데리고 놀았다. 얼음땡 놀이를 시작하고 나를 얼음으로 만들고서 풀어주지 않았다. 엄마가 오면 일러줄 생각으로만 얼음을 버틴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노래를 함께 들었다. 만화영화 주제곡 모음이었다. 좁은 부엌에서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물놀이도 했다.

엄마가 돌아오는 오후 6시 퇴근 시간부터 엄마가 걸어서 올라오는 시간까지 창문에 턱을 괴고서 내다본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것이 힘들면 저만치 내려가 있거나 아예 공장 앞까지 가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린 적도 있다. 엄마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좋았다. 엄마는 우리에게 따뜻한 양지이자 공기였다.



엄마가 삼화고무에서 나오는 점심을 드시지 않고 빵 교환권으로 바꾸셨다가 보름에 한 번씩 빵을 받아 오시는 날이 있는데 그 빵이 너무 맛있었다는 기억이 선명하다. 엄마의 고달픔을 모를 수밖에 없는 나이였던지 그 빵은 그저 맛있었다. 페스트리 한가운데 딸기잼이 있던 빵. 지금껏 그 빵맛보다 맛있다고 느낀 빵은 없었다. 어른이 되고서 한 번씩 생각이 나면 일부러 찾아보기도 했는데 그런 맛은 이제 만날 수 없는 것 같다.

영원히 있을 것 같았던 삼화고무는 부산이 신발 생산 메카였던 시절에 운동화를 만들었다. 타이거 운동화를 만들다가 나이키의 OEM 생산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나이키와 아디다스에 밀려 공장이 없어지는 날도 왔다. 삼화고무의 직원이 1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일자리를 잃은 엄마들의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


엄마는 곧 다른 일을 찾으셨다. 지금은 없어진 부산역 KTX 승무원 숙소. ktx 승무원들이 머물다 가는 숙소의 관리 청소를 하셨는데 마음이 맞는 오래된 지인과 짝이 되어 오래도록 그 일을 하셨다.
청소일을 하시며 몸을 사리지 않은 엄마는 표창장받기도 했다. 엄마 말대로 소위 높으신 분들  많이 모인 연단에 올라가 큰 상과 약간의 상금을 받으셨다.  엄마는 가끔 그때의 뿌듯함을 얘기하셨는데 그땐 흘려 들었던 것 같다. 엄마 빼고 아빠, 오빠, 나는 모두 감정이 무뎌서 공감을 못 해 드렸었다. 고생을 얼마나 사서 하셨으면 청소 열심히 한다고 상까지 주나 싶기만 했다. 엄마는 오래도록 더 열심히 후미진 곳과 창틀까지 손보셨고 그 덕에 늘 관절염에 시달리셨다.

그것마저도  이제 15년도 더 된 일이. 그때만 해도 예쁘장한 얼굴, 평균적인 몸매에  옷맵시를 다듬던 자존심이 살아있는 엄마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드라마나 일상을 비롯해 언제나 모든 이야기를 구구절절 재밌게 재현하는 엄마는 동료들에게 상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사실 어릴 때부터  일하러 가야 하는 엄마는 나의 외로움의 원인이었다.  엄마와의 시간을 늘 갈망해 오다 커서는 그만 잊고 말았지만 나는 엄마와의 친구 같은 사이를 너무나 갈망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알면서도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엄마의 속은 어땠을지 물어보고도 싶지만 먹고살기 바빴던 엄마에게 그런 기억이 있을지 두려워 묻지 않았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 한 달을 휴직하시며 내 바라지를 해주신 엄마와 좋은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데 자주 싸웠었다. 내 새끼 생기고 나니 나의 이기심이 하늘을 찔렀나 보다.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지금처럼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날들이다. 5년만 더 빨리 부모님과 여행도 자주 하고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70대를 훌쩍 넘기신 부모님은 걷는 게 아주 힘들어지셨다.


지금도 역시 내 삶을 사느라 이제 집에 계시는
엄마와 하루를 보내는 것도 어렵다. 엄마랑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이젠 다리도 눈도 치아도 모든 게 아프신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모녀가 함께 팔짱을 끼고 쇼핑을 다니는 모습을 보면 깊은 곳부터 아린다. 우리 엄마, 좋은 거 많이 사드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코가 석자다. 가까이라도 계시면 싸우기도 하, 챙기고 엎치락뒤치락  살 비비며 그리울새  없이 살 텐데, 시집을 가버린 딸은 어쩌다 손님처럼 다가 간다.  차 타고 거리 30분이건만 이리 손님처럼 오가는 것이 가장 죄송스럽다.


책 속의 한 구절이 가슴을 애이게 만든다. 늘 두려웠듯이 언젠가 엄마를 영영 놓칠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아찔해진다. 엄마의 많은 날들이 백지장으로 변해버리기 전에 까만 글씨를 한 자라도 더 새겨본다. 엄마와 통화를 시작하면 기본이 30분이다. 일하면서 통화하기에 가끔 버겁거나 지루하기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통화할 때마다 녹음을 해두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엄마의 모든 이야기는 내게 소중한 유산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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