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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Dec 14. 2023

엄마의 집

그곳이 내 고향이구나


어려서부터 꿈에서는 자주 이사 갈 새집을 보러 다니곤 했다. 누군가가 낯선 넓은 집이 이제 우리 집이라고 말하는 꿈을 꾼다. 문을 열면 넓은 거실이 있고 아무리 보아도 두 개의 집이 하나가 된 형태로 심하게 넓은 집이 있다. 방문을 열면 방이 있고,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면 또 방이 있고, 침대며 책상이며 원 없이 놓아도 티 나지 않을 큰 집이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듯이 갸우뚱 거린다.  다음번 꿈에 나온 집은 더 근사했다. 화려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이사랄 것도 없이 당장 거기서 살면 되었다. 그 무렵 새 집을 찾는 꿈과 함께 여러 가지 꿈을 꾸었다. 이사를 하고 난 뒤에 집을  찾아가지 못하는 꿈도 자주 꾸었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우리 집은 이곳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기 따로 있다며 기분 좋게 친구들을 데리고 이사한 새 집을 소개하려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집을 잘 찾지 못하는 나는 꿈속에서도 애가 타서 돌 지경이다.


그렇게 '집 꿈'을 자주 꾸던 날들이 있었다. 엄마에게 물었더니 역시나 같은 꿈을 나보다 더 자주 꾸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의 꿈은 나보다 조금 더 힘든 꿈이다. 살던  집이 불에 홀랑 타버린다거나 비 오는 날 천정에서 비가 줄줄 새어 들어오는 꿈이라거나, 집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단다. 그땐 엄마가 몸이 많이 좋지 않을 때였다. 한 번도 의지할 데 없이 모든 일을 오롯이 책임지는 팍팍한 삶이라 심리적으로도 힘드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엄마와 나는 같은 불안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 엄마. 잊지 말아야지. 그 이상한 꿈들을 잊지 말아야지. 내가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알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나를 비롯해 가족들을 위로하고 싶다.


부산 안창마을 아래, 87번 구종점이라는 버스 회선지 도로가에 어릴 적 집이 있었다. 나란히 서있는 동네 슈퍼마켓을 길 너머에 마주 보고 있는 집. 엄마의 계산으로 여기가 아이들 키우고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싶었던 이발소 2층 주택. 오빠가 7살, 내가 4살 때 부산 민락동에서 이곳으로 이사 왔고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첫 집이다.  큰 버스가 좁은 이차선 도로를 유턴해서 다시 돌아나가는 모습을 재밌게 보곤 했다. 버스 길이 뚫려 그 너머로 길이 이어진 것이 몇 년도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일은 어린 내게 대단한 일이었다. 막다른 길이 열리는 경험은 많은 일들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 뒤로 엄마는 지금은 구축이 된 신축빌라로 오기 전에 멀지 않은 곳으로만 딱 두 번의 이사를 했다.



범천동 이발소 2층 집과

성북 고개 골목 안 초록색 대문 2층 집


하늘이나 바깥 풍경은 볼 수 없었던 다닥다닥 붙은 주택 사이의 집에서 옥상만큼은 늘 사방으로 열려 있었다. 나는 자주 옥상에 가려 했다. 거기서 360도 돌아보는 세상은 비슷해 보였다. 내려다보는 지붕의 민낯들은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 안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달랐다. 층층이 아래로 깔린 옥상 풍경, 널린 빨래, 빨간 대야에 심겨 잘 가꾼 상추나 고추가 있는가 하면  방치된 식물 화분들이 구르는 집도 있었다. 집집마다 있는 파란색 물탱크와 빨랫줄은 잊을 수 없다.


 옥상은 늘 우리의 소풍지였다. 여름이면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옥수수나 수박을 먹으며 바람을 느꼈다. 엄마가 담근 김치랑 함께 옥상에서 구워 먹은 삼겹살 맛을 잊을 수 없다. 고기를 못 드시는 엄마도 고기 굽는 냄새가 덜 힘들 수 있었다. 그저 평범해서 잊기 쉬운 날들이었지만 평범해서 아름다운 날이다.


동네 사람들과도 골목에 돗자리를 펴고 너도 나도 앉아 옥수수를 뜯고 이야기하며 놀았고 어린 우리는 족은 골목을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넘어져서 까진 무릎에는 피가 고 딱지가 굳으면 또 넘어져서 갈라진 딱지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때마다 울며 달려들 엄마가 있었고 어김없이 그때도 분명 너무 행복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시절을 아프게 기억하는 것은 그 안에서 더 웃지 못했던 우리 가족 때문이다. 서로를 향해 조금 더 웃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빠가 엄마를 좀 챙기고 사랑을 줄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사소한 일들로 잦고 크게 싸우시는 부모님은 그 시절의 오빠와 나를 조금씩 투명 인간이 되게 했다. 그건 아무도 원했던 바가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에게 스며든 눅눅함이었다. 


내겐 좋은 어머니도 좋은 아버지도 계셨지만 좋은 부모님이 없었던 것 같다. 원체 꿈과 이상, 성격, 체질, 식성까지 모든 게 다른 두 분이셨다. 숨 는 것조차 달랐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어떻게 두 분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내내 궁금했다. 그때로 가서 이거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리고 싶기도 했다. 하필 아빠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얼굴 두 번  보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결혼 한 엄마는 시집을 온 첫날부터 아빠의 태도에 실망을 느꼈다고 했다.  엄마에게 들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 중에서 적어도 100번은 회자된 된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듣고도 믿지 못할 만큼 못난 남자의 이야기였다. 여자를 사랑하고 아낄 줄 모르는 철없는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는 아버지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철든 남편으로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말을 진심으로 해주시길 바랐는데 언제나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부인할 뿐 모르쇠로 일관한다.



아름답던 그 노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들으며 우리 엄마에게도 언젠가는 저런 날이 오기를 기도했던 어린 내가 있었다.


성북고개, 성북시장은 이제야 내게도 진짜 중요한 곳이 되어 있다. 고향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없었는데 이제는 진짜 마음의 고향이다. 그 성북고개에는 내가 다닌 초등학교를 비롯해서 우리 남매 밥 먹이러 바삐 걸어다녔던 엄마의 인생이 모두 담겨 있다. 나를 키워온 엄마, 아빠의 젊은 날들이 퇴색되었을지라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모님이 젊어 뛰어다니시던 때부터 절뚝 절뚝 느린 걸음을 옮기시는 지금까지가 고개에 묻어 있다. 이젠 나의 고향이라 불리우는 곳. 마음 속에서도 고향이라 외치는 곳. 왜 이렇게 늦게 사랑하게 되었나~ 많이 사랑하고픈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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