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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Dec 21. 2023

당신의 자리

엄마의 말뚝

김ㆍ영


98년에 4년 동안 대학을 다녔다.

밥이나 옷이나 집

그런 걱정을 나 대신해준 이가 있었다.

우리의 단칸방이

두 개 방이 되고 세 게 방이 된 것은

엄마의 노동 덕이다.

아르바이트, 휴학

내가 번 돈은 젊고 유쾌하고 가벼웠지만

엄마에게는 가혹한 돈이었다.

그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20년 뒤에야 안다.

하루, 한 달을 꾸려가기 힘든

사십 대의 어느 날에야 안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열쇠 복사를 하고 있다.

이 열쇠로는 열 수 없는 문.

고작 이거 하나 싶다가

내 마음의 열쇠를 찾으려

책이나마 읽어 본다.

내 이름 석자를 잊어간다.

다른 이의 이름을 도장에 새기고 있다.

가끔 이름에 얽힌 관계들이

내게도 전해지지만

그래도 아득하고 너무나 먼 이름들.

아무것도 모른다.

그 이름 김ㆍ영ㆍ애

한 여자의 생이 다른 생명을 위해

어떻게 뼈에 진액이 녹아들었는지

그럼에도 세상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나.

하루 종일 앉았다.

엄마 생각에 또 멀리 다녀온다.

후회의 시간들이 발견되면

이렇게 또 한 자 쓴다.

왜 끝나지 않지.

분명 내 두 발로 걸었는데

땅에 닿아본 느낌이 없다.

그제야 허튼 곳을 보고 산 것은 아닌가

철렁한 가슴

아주 멀리 돌아가 되짚어 오는 길에서

이렇게 많은 슬픔이 건져질 줄이야.


by 열쇠책방




단칸방에서 남매를 키우셨고 어렵게 집을 늘리서도 엄마의 소원은 아들 방, 딸 방 하나씩 주는 것이었다. 엄마는 남매에게 침대와 책상 하나씩은 꼭 마련해 주고 싶으셨다.  이외에는 본인을 위한 어떤 그림도 그리지 않으셨다. 


1998년 내가 대학교1학년이 될 때 나는 처음으로 내 방을 가지게 되었다. IMF를 지나던 그때 내 대학 등록금을 모으느라 혹독하게 일해야 했던 엄마의 세월을 이제야 나는 슬프게 돌아본다. 


엄마의 수고로움과 검소함 덕분에 남매에게 각자의 방이 생겼다.  저녁먹고 나면 자기 방으로 가기 일쑤였다.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갈급했던 자기만의 방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 난 우리 집이 다른 집과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었다. 아빠와 오빠가 상극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서로를 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행복하지 않은 집, 웃음이 없는 집, 대화도 없는 집, 부모님 사이의 대화는 없이 싸우는 소리만 들으며 살다 보니 누군가에게 먼저 내 얘기를 꺼내는 것은 내게 가장 어렵고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나는 우리 가족 사이의 길이었다. 나와 엄마는 함께 웃고 얘기 나눈다.  나와 아빠도 함께 웃고 장난을 친다. 오빠도 나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넷이서 한 가족인데 넷이서 웃을 수는 없었다. 가족이 모이는 자리.  오빠를 쥐 잡듯 하는 아빠와 오빠를 감싸는 엄마. 부모님의 언쟁이 정말 싫었더랬다. 뛰쳐나가고 싶었던 밥상머리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일찌감치 집에서 독립했다. 나는 이제 내가 꾸린 가족과 내 집에 살고 부모님과는 다른 공간에 산다. 그제야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느낄 수 있었고 나 자신의 다른 모습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소통의 길이었던 내가 허물 벗듯 빠져나온 자리엔 묵은 감정들이 쌓이고 있었다. 오랜 침묵과 원망이 쌓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내 행복을 찾겠다며 그 모든 걸 뒤로 했더랬다.



 한 번의 이사를 하며 친정이 주택에서 벗어나던 10년 전에도 많은 짐들을 최대한 비워냈었지만 아깝다는 이유로 우리의 어린 시절이 담긴 짐들은 그대로 가져왔었다. 엄마의 기억, 엄마가 다시 들려주지 않았다면 잊고 말았을 어린 우리의 모습들이 많았다. 싸우고 지지고 볶았지만 우리 남매가 부모님 인생의 전부였다는 것을 제대로 보았다.


내가 결혼으로 독립을 하고서도 집엔 주인 잃은 짐들과 오갈 데 모르는 쓰던 가구들이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엄마가 빠듯한 살림에 무리해서 넣어주신 침대와 책상은 절대 엄마 손으로 없앨 수 없는 추억 그 이상이다. 가끔 가는 친정에 자리를 차지한 가구와 짐들. 비워드려야 했는데, 사진첩, 졸업앨범, 상장, 일기장, 기타 등등의 짐들이 아직 그대로였. 엄마 손으로는 절대 버릴 수 없는 것들일 텐데 진즉에 내가 가져와야 다. 그 짐들을 정리하고 가져오면서 우리 가족에게도 추억이  많았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린 우리의 모습 뒤로 젊은 엄마와 아빠가 보인다. 그리고 내 앞에는 나이 든 노부부가 내가 허물 벗어둔 짐과 함께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먹거리가 생기면 '희야 안 오나' 소리가 먼저고 희야 오면 먹자고 냉동실에 보관하는 것들이 많다. 한 때는 나 좀 기다리지 말라는 말도 했었다. 그때만 해도 내 마음이 단단히 얼어있었던 이유 때문이지만 지금은 많은 것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아픈 곳은 자꾸 만지게 된다.

내겐 엄마가 그렇고

내 어린 시절이 그렇다.

자꾸 들여다보게 되고 어루만진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족을 다복하게 건사하지 못하고 엄마에게 더부살이하는 가장으로만 치부했던 나의 아버지에게 아버지만의 공간이 없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집에 들어와도 반겨주는 것은 텔레비전 밖에 없으니 술 먹고 들어와 잠만 자는 곳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자리가 결코 좋은 자리는 아니었겠지. 아버지는 어떻게 자신이 화목한 가정을 꾸려야 하는지 몰라도 너무 몰랐다.



오랜 시간 마음에서 친정을 방치했었다. 짐스러워했었다. 두 분의 불행은 내 탓이 아니라고 밀어냈었다. 너무 다른 두 분 사이에서 내가 빠지면 자연스레 닮아갈 줄 알았지만 골은 깊어졌다. 그게 처음부터 안된다는 것을 고서야 용서가 되었다. 이제는 다시 중재자가 되어 드려야겠다는 마음도 생겼다.


아빠와 아버지라는 호칭을 여전히 섞어가며. 어지럽게 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도저히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감정의 기복을 지나 앞으로의 시간들은 어떻게 써갈 수 있을지 기대가 생겼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의 행복은 뭘까. 아버지는 무슨 낙으로 사실까? 자식 키울 때는 몰랐던 손주 키우는 재미라도 아셨으면 좋겠는데 자식에게 다정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손녀에게도 마찬가지셨다. 꼭 어릴 때의 나를 대하듯 손녀에게도 버럭버럭 하신다. 한동안 그게 또 엄청 싫었었다.


손녀는 외할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는 온갖 보드게임과 장난을 치지만 외할아버지 앞에서는 침묵이다. 딸에게 먼저 살가워지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달라진다는 걸 이제 안다.


나는 이제 손녀와 외할아버지 사이에서도 길이 되어야 한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팔짱을 끼고 셋이 되었듯이 극과 극인 부모님이 나라는 중간계를 거치면 부드러워진다는 걸 알았듯이 딸에게도 단순해서 유쾌한 외할아버지를 알게 해 줄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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