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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Dec 24. 2023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

그렇게 사랑이 다시 온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P.103

나는 불행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불행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나는 우는 인간이 아니다. 단지 우는 순간, 웃는 순간이 교차할 뿐이다. ‘불행한 사람, 화난 사람, 과거의 어떤 사람’이 나라는 고정된 생각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 「부서진 가슴에서 야생화가 피어난다」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다. 돈을 벌러 가야 하는데 써먹지 못할 공부를 한다고 학비만 날리고 있다는 죄책감에 늘 무거웠다.  아르바이트로 피곤했고 애정이 없는 어설픈 대학생활로 꿈도 현실도 그렇게 미해져 버렸다. 아무런 욕망을 품지 못했다. 차라리 '돈을 벌자'라는 목표를 가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내가 중. 고등학생일 때 엄마는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었다. 갑상선, 임파선 그런 이름의 병과 천식이 시작됐더랬다. 그런데도 나는 철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겉으로 밝았고 졸업 후에도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다. 엄마가 어렵게 모아 주신 돈으로 4년 대학을 나왔지만  전문직이 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일들만 했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미안함에 가족들과 겉돌았다.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  안은 결코 밝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1시간을 오셔서 출퇴근 마냥 한 달이 넘도록 우리를 돌봐주셨다. 엄마가 문 열고 들어오는 시간만 기다렸다.


 딸과 손녀, 사위의 밥, 집안청소까지 돌봐주고 돌아가서 또 이런 일들을 할 엄마를 생각하니 화가 났다. 나에게 화가 난 것이다. 엄마를 보내기 싫었다. 일주일 정도는 그냥 계시면 좋겠는데 끼니를 챙기러 매일 다시 가신다. 매일 헤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어릴 때도 분리불안이 조금 있었는데 비슷한 감정이 든다.


나는 이 모든 게 이렇게 다 힘든데 엄마는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다 책임진 거야. 엄마를 힘들게 한 것이 나인 것 같아서 내가 너무 싫어졌다. 이상하다.  오히려 그런 마음들이 엄마에게 화를 내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아기를 잘 못 봤다고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부조리다. 그래 놓고 엄마가 깨끗이 깔아준 침구에서 나는 달게 잤다. 또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너무 맛있게 먹었다. 음식 알레르기가 있으셔서 아무거나 잘 못 드시는 엄마는 정작 그때 우리 집에서 뭘 드셨을까. 그때 난 왜 그랬을까. 우리 엄마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순간 바라는 것은 관조를 통한 깨우침이다.


그때를 엄마에게 물으니, 엄마는 딸 산후 구완을 잘 못해준 엄마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계셨다. 약한 딸 보약 한 재 먹이고픈 마음이 있어도 주머니 사정이 빤해서 말도 꺼내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셨다. '아니, 아니야.  나 말고 엄마를 좀 챙겨줘. 엄마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내가 행복해.이 역시 내 마음이 편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일까.'



엄마를 고생시키는 내가 미워졌다. 아이가 한참 커갈 때 너무 예쁘고, 자랑스럽고, 기뻤다. 그런데 그런 행복한 감정 뒤로 한동안 우울증도 왔다. 어느새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늘 바쁘던 엄마가 나를 채근하던 일들이 이유 없이 자꾸 생각난다. 내 아이가 나 같아 보여서 안쓰러우면서도 나는 어느새 나의 엄마가 되어 있다. 엄마가 되어 보니 몸과 마음이 쉴 틈이 없다.  '말도 안 돼. 엄마이걸 참았어. 난 엄마처럼 하라면 못해. 난 엄마의 발 뒤꿈찌도 못 따라간다고... 엄마가 왜 미안해해. 말도 안 돼.' 미안한 마음이 왜 자꾸 원망이 되어가는지 정말 모르겠다.


( 사랑과 미움이 정반대의 관계에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든가, 또 반대로 사랑의 배후에 미움이 있다든가 그런 것이 무의식의 작용이다. 애초에 자신 안에 역설이 있다.)



내 존재로 두 발로 서고 싶어서 늦은 나이에 다시 내 책상, 내 책, 내 시간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가 놓쳐버린,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 것만 같다. 주르륵 이유도 모를 눈물이 난다. 이유를 알고 싶다. 그렇게 내 안의 샘 그리고 행복의 파랑새를 찾는다.


사람은 결국 가족의 사랑 없이는 외로워지게 되어 있어. 결국 돌아올 곳은 가족이야. 네가 사랑을 주는 만큼 너는 덜 외로워지는 거야. 파랑새는 내 안에 있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던 시간도 꽤나 길었다. 이 마주함이 자신의 숙제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길게 끓어온 오랜 숙제와 재회한다. 도망가지 않고 직시하고 싶다.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끝과 시작처럼 떠난다는 것과 되돌아온다는 것은 하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엄마를 떠나왔다가 다시 엄마에게로 돌아간다. 그것은 나를 떠났다가 다시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길이기도 다. 엄마에게 비춰보인 내 모습을 지나 내 모습을 이해하고 나서야 독자적인 엄마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사랑으로 왔다. 이것을 잘 정리해서 담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우리의 비탄을 느끼며, 그로 인하여 더 많이 사랑한다. 그렇다. 그것이 아마 행복인지도 모른다. 즉 우리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감정 말이다.  
- 알베르 카뮈, <긍정과 부정 사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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