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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Jan 01. 2024

모든 나를 만나러 갑니다

나의 울타리



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울타리가 있다.  자라온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방패로 불안과 위험을 피하고 싶어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아무도 쉽게 들어오거나 쉽게 나갈 수 없는 닫힌 울타리였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를 반기는 마음은 항상 가득했다. 학교에서 집 그림을 그리게 면 창문부터 여러 개를 그렸던 것 같다. 소통을 원했던 게 아닐까. 울타리 문 옆을 기웃거리며 기회를 엿보지만 조그만 변화에도 화들짝 놀라서 다시 퇴각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여기서 달라지면 큰일이 나거나 더 빠지는 줄 알았던 것이다.


첫 대면하는 사람들과 어색하진 않다. 오히려 유쾌하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런데 깊게 인연을 주려 하면 슬쩍 발을 빼고 싶어 하며 거리를 두는 를 수없이 느꼈다. 내가 왜 그러는지 나역시 알 수 없었다.  유쾌하고 진득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만 내 얘기를 하기에는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 상대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지만 듣기만 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주고 받은 대화가 생긴 사람은 벽을 넘어 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잠그지 않고 열어둔 문으로 그들이 오고 간다.


보이지 않는 그 벽을 마음으로 허락한 사람들은 남편이 되었고, 몇 안 되는 친구가 되었고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살면서 더 많은 사람을 허락하지 못한 이유가 뭐였을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왜 어려웠을까?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양한 해석으로 내가 설명되겠지만, 나는 나의 답을 찾고 싶었다. 



내가 그동안 <울타리>가 포함된 글을 참 많이 썼었다는 걸 다시 알게 되었다.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끼는 것 그것은 내게 커다란 숙제 같았다.





나는 왜 울타리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했을까?


많이 싸우시는 부모님 곁에서 자라다보니 상당히 방어적인 태도가 된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이 이 정도라면 바깥은 뻔하지 않을까.  사실은 바깥 세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무서워진 것이었다.


울타리에 대한 생각은 최근 3년 사이에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글을 통해 작은 표현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참 모자라고 이상하고 가치 없는 사람 같았다. 아프고 불편했던 일들을 써보고 나니 조금씩 해소되는 것도 있더라. 그제야 나를 사랑하는 방법도 알게 되고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알게되고, 나와의 사이가 좋아지니 비로소 가족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잡글을 시간 내어 읽어 주시는 분들이 있었고 마음을 보내 주시며 자기의 이야기들을 더해 주시는 것을 통해 소통을 배워갔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진짜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수준의 친밀감이 생긴다는 걸 알았다. 설령 그 이해가 온전한 이해가 아니라도 좋았다. 인간의 감수성과 공감력은 사람들을 끈끈하게 이어주는구나. 그렇게 이웃님들과 주고받은 댓글들이 내겐 치유의 약이었다는  알게 되었다.  




오픈 채팅으 함께하는 필사 독서모임을 만나 함께 성장하는 시간도 만났다. 살다보면 어떤 시기에 기존에 알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멀어지는 동시에 새로이 내 삶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안정감 있는 관계가 생기는 것은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모님의 종교대로 불자였으나 순수하게 신성을 느꼈다. 성인 되면서는 무신론자에 가까워졌지만 그래도 신을 생각한다. 신이 있다면 어느날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 내게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게 용기를 주지 않을까.


내면에서 이제는 필요 없는 것들을 아주 조금씩 제거하며 내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대부분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원망의 마음이었다. 내 안의 원망을 알아차리는 동시에 원망이 녹아가는 걸 느낀 것 같다. 내안의 원망의 샘을 찾은 덕분에 행복의 샘도 같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이 아니라 진짜 나, 혹은 스스로 생각하는 나 이상의 좀 더 근본적인 나를 찾아갈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책이었고 지혜를 선물 받았다.



깨달음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여러길을 돌고 돌면서 막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나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울타리 안에 있는 것 말고 새로운 도전과 실천을 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독서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였다. 스스로 서는 법을 몰랐던 내게 글쓰기는 학습의 창이자 나를 마주하게 한 거울이었다. 


나는 누구이고, 세상을 어떻게 읽고 반응 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했다.  나의 내면 아이와 수없이 만났다. 더불어 수많은 방어기제, 두려움, 스스로의 부정 신호들을 만났다. 무엇보다 나를 경험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책을 통해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비춰본 내 모습을 통해 많은 나를 발견했다.


그동안 가짜 일기를 써온 게 아닐까 싶게 최근에 쓰게 되는 일기들은 진짜 나같이 느껴진다. 이제야 진짜 나와 만나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책 내용을 쓰는 순간에 나 자신의 모습도 함께 쓰고 있다. 이게 얼마나 선물 같은 시간인지 온전히 설명할 수가 없다.  한 권 안에는 삶의 과정을  담고자 노력이 있다. 노래 한 곡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 가지고 있다.


나는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 데미안



지금도 계속 그 과정에 있다.  내 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며 나 스스로 나의 서포터가 되려 다. 그 과정과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  똑같은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곤 한다. 같은 질문들을 계절을 맞듯 반갑게 맞이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이전의 생각도 달라진 생갑도 함께라서 소중했다.


매년 같은 봄이 오지만

다른 봄이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어제의 나 역시도 나라는 것을 알기에 무엇도 부정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리고 내일이 나에게도 이제 말을 건다.

 


그야말로 책은 앉아서 하는 시간 여행이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멋지게 불러내고 재조합하고 연결 지어가며 끊어진 나의 인생 스토리들이 오늘의 페이지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의 내가 있어야 어제의 내가 있고,

오늘의 내가 있어야 내일의 나도 있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다.


이제야 내 인생 키워드들이 무엇인지 그 이름을 알았다. 작은 점들이 연결되어 그리게 된 그림. 내가 가진 이야기들을  많이 만나가고 싶다. 이 또한 모험이다. 두려움 가득한 모험이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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