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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Nov 30. 2023

감정의 바닥

거기서 다시 시작해

나 자신은 나를 다독이며 잘 살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든 나름 행복하게, 의미 있게, 낭만 있고 예쁘게 살 수 있다. 가족이 함께 밥 먹는 시간이 긴장과 불안이 아닐 수 있다. 지지와 응원 그리고 헤픈 웃음으로 나아수도 있다. 시댁 식구들도 한없이 쿨하고 내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각자의 욕망과 희망, 기대 같은 것이 모두 살아있고 대부분을 스스로 해결하는 독립적인 성향들을 가졌다. 시집을 와서는 좋은 날에 시댁 식구들 만나서 기쁨을 나누는 일들만 해온 것 같다. 복이 터졌다.


참 다행이지. 나의 아픔을 이해해 주고 나의 기쁨을  기뻐해 주는 남편을 만나 이렇게 딸을 낳고 세 식구 잘 산다. 숨겨둔 감정 없이 뒤로 아픈 구석 없이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서는 나를 우울감으로 몰아가는 샘이 여전히 존재한다. 뒤로 아픈 사람, 눈물도 참아야 하는 사람, 힘들 때 짐을 나눠질 사람이 없었던 사람. 늘 어깨가 무거운 엄마라는 안쓰러운 사람이 늘 내 안에서 울고 있다. 그래서

가끔 터져 나오는 넋두리를 글로 쓰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리고 어제도...

엄마, 아빠, 오빠의 실타래는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겉으로 평온한 척 살았다. 셋이서 지지던지 볶든지, 이건 엄마의 '업'이다. 세 사람 사이에서 엄마의 속이 터지든지 말든지 나는 일단 손을 놓았다. 내가 늘 개입해서 을 써봐도 언제나 똑같았던 세 사람을 나는 견디지 못했다.



엄마의 남편과 엄마의 아들이다.

나의 아버지이고 나의 오빠인데...

내 책임이 아니길 바란다. 

나라도 멀쩡히 살고 싶었다.



셋은 함께 살고 나는 떨어져 나왔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가정이라는 독립으로... 그러나 나의 샘의 원천이 친정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감추고 싶던 감정이 어느 날에 터지면 극단의 감정을 만나게 된다. 분노의 역류처럼 화기가 끊긴 듯 조용하다 싶은 그 순간에 문을 열면 폭발하고 만다.


이 감정이 나의 바닥이다. 

그것이 가끔 역류했다.

거기서 생긴 균열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



내가 없는 친정은 매일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우지 못함에 소리 지르며 분개한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만 있고, 먼저 바뀔수는 는 고정값, 절대값이 있다. 누구도 특별한 잘못은 없는 상황이지만 아무도 서로의  서사가 담긴 실타래의 시작점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관계만 오래 남아있다.



이 관계가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빠에게 분가를 수없이 권했지만 그는 독립할 힘이 없다.  스스로 먹고, 자고, 일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것. 성인이면 해야 하는 일들조차 나이 드신 엄마에게 의지한다. 엄마가 다 해주니까 고생할 이유가 없다고만 생각한다.  엄마에겐 아픈 손가락. 엄마가 그렇게 키워서 자초한 일이 되어버렸다. 엄마도 일이 이렇게 되어 속상하지만 이 관계들은 오래도록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나이만 먹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들었다. 딱히 하고 싶은 이야깃거리도 없었다. 인간관계 속의 스트레스를 두려워하는 내가 참 많이 변했구나 싶다가도 여전히 내가 가족관계 문제 앞에서 뒤로 숨고 있음을 인한다. 아빠의 광풍을 막아주는 따뜻한 볕인 엄마 뒤에 숨어서 비겁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 결국 닿지 못할 것 같다.



나보다 더 응달에 놓인 것이 오빠다. 아버지와 상극인 사람,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말이나 눈빛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 그 싸늘한 자리를 바꾸어 따뜻한 볕으로 옮겨주고 싶은데 자꾸만 방안으로 그림자로 응달로 숨어버린다. 오빠라기엔 이제 너무 낯선 아저씨가 되어 버려 애잔하다.



부모님의 병세로, 오빠의 길어지는 무직, 직, 이직으로 원래부터 지 않던 부자 사이에는 날이 서있다. 그런데 한 집에 산다. 대화가 없다. 엄마는 두 사람의 밥상을 따로 차린다. 내가 친정에 가는 날이 되어야 겸상을 한다. 밥 먹을 때도 통화를 할 때도, 서로에게 분개한다. 탓한다. 언어가 그랬다. 타고난 모국어가 그렇게 아팠다. 아우성.

모두 나만 기다리는데 나는 피하고 싶다.



그렇다고 엄마가 나쁘냐? 아니 너무 좋은 사람이지. 재능이 많은데 한 번도 피어보지 못하고 꽃이라 한이 많지.

그럼 아빠가 나쁘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이 애 같은 사람이지만 악의가 전혀 없는 사람이지. 다만 가족을 품거나 랑할 줄 모르는 사람. 막내로 받고만 자라서 주는 사랑을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우리 가족에게 비극이지.


그럼 오빠가 나쁜가? 세 사람의 유기적 관계에 매몰된 사람, 엄마 뒤에 숨어서 아빠의 복제인간으로 장한 비극이지. 독립하지 못한 인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못하더란 말이지. 역시나 자존감이 낮았던 거지.


엄마만 보면, 아빠만 보면, 오빠만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셋이 함께 있다는 것이 비극 되었다.

상처 위의 상처, 그런 딱지들이 켜켜이 쌓여 굳어졌다.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  오고 가는 날카로운 소리들이 무엇을 만들어 냈는지 나는 이제 안다. 멀쩡해 보인 나는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프고 힘들었다. 나는 친정 생각만 하면 괴롭다. 나의 반쪽과 반쪽이 언성을 높인다. 싸울만한 일이면 차라리 끝이 있을 텐데 결론이 없는 입씨름이다.  사고 치는 사람은 없고 그래서 뭐 최악은 아닌데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힘들다.


나도 자존감이 낮은 상태로 어른이 되었지만 천성은 긍정적이라 내 살길을 스스로 찾아온 편이다. 가족과의 약간의 거리두기.


부모님을 잘 챙기고 싶다가도 나는 문득 버겁다.

"희야 안 오나"

나를 기다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발길이 무겁다.



우리 엄마, 영애의 현실이다.

들쭉날쭉 일을 하는 결혼하지 않은 40대 중반아들과 평생 일은 꾸준히 했지만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의지 할 수 없는 남편의 뒷바라지로 그대로 늙어버렸다. 남자가 둘이나 있는 집인데 집안의 사소한 모든 일은 모두 엄마의 몫이다.

엄마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전화가 온다.



엄마는 밥충이들이 되어버린 남정네들이 지긋지긋하고, 자신의 아픈 몸은 더 지긋지긋하다.

변할 수 없는 삼각구도, 답이 없는 세 사람을 향해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로또 당첨되면 독채 하나씩 주고 싶다. 로또 말고 그냥 내가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건 탁월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트랙 같다. 나는 그곳에 들어서서 레이스 하고 싶은데 난...

난... 아무것도 못 되었다.


아빠는 일평생 일을 쉬지 않고 해왔으므로 자신의 책임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어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 않음을 분개한다. 내 눈에는 자기밖에 모르는 삶이었다. 하루하루 밥벌이만 충실히 했을 뿐, 자신의 미래나 자식의 미래는 생각해 보지 않은 인생이었고 대화가 안 되는 아빠였고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었다. 한 공간에 늘 함께 있긴 했지만 정서적으로 아버지 역할은 부재중이었다.


부모님의 애물단지 아들,  마흔 중반이 넘도록 제 가정도 못 꾸리고 독립도 못하고 있는 아들이 늘 '화'라는 감정을 밑바닥에 깔아 두고 있다. 부모를 건사하기는커녕 , 밥 주고 잠재워주는 하숙집이라도 되는 듯 가족사의 모든 일과 부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며 오빠를 떠올렸다. 저 집귀신 탓에 엄만 제대로 숨통 한번 튀어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고 그 울분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아빠는 아들을 고운 시선으로 보는 날이 없이 늘 으르렁 거린다.



누가 누구의 원인인지 나는 이제 모르겠다. 시작은 오빠였으나 어느 순간 자신의 논리와 고집이 센  엄마였다가 이성적 판단이 답답한 아빠에게로 화살이 갔다가 다시 내 탓이 되곤 한다.


 엄마가 두 남자를 케어해주지 말고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밥먹이는 사명감도 좀 내려두면 좋겠다. 진작에 그랬어야 한다. 놀기 삼아 집을 벗어나 우리 집에라도 좀 와있으라고 해도 소용없다. 엄마 없어도 잘 살 것만 같은데 '내가 없으면 집이 어떻게 돌아가겠어'라는 집념이 너무 강한 엄마.  강하고 깊게 내린 뿌리가 나를 찌른다.



엄마는 내게 힘듦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데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 미안해하며 내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오빠가 사고 칠까 봐~ 아빠가 사고 칠까 봐 ~

울타리에 넣어두고 잘 케어하던 엄마도 이제 많이 늙고 지쳤다. 늘 울타리 안에만 있던 두 사람은 밖에 나가서 할 줄 아는 게 없고 책임감도 없어서 어른이 아닌 아이로 살고 있다.



힘이 부치는 엄마의 울타리가 이제 허물어지기 직전이고 모든 고인 물이 내게 쏟아지려 하고 있다. 제발 엄마 먼저 죽으면 안 돼~  꼭 아빠 먼저 가신 다음에 엄마는 솔로 인생 즐기고 가야 해~~  아빠를 내게 던져두고 가면 안돼~

엄마가 만든 작품들 내게는 너무 버거워.

내 속내는 이렇게 이기적이다.



글로 속을 풀고 나면 더 불쌍해지는 엄마가 또 가슴에 힌다. 엄마는 내 눈치를 볼 것이고, 내게 좋은 것만 보이려 할 것이고 내가 힘들까 봐 엄마가 다시 울타리를 칠 것이다. 엄마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나의  울타리는 바로 가족이 주는 이 불안한 신호들로 둘러 쌓여 있다. 잃어버린 내 자존감, 자신감, 그것들을 찾기 위해 힘들었던 나는 늘 괜찮다고~ 좋다고~ 나는 긍정적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나의 민낯은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늘 묶여있는 기분이었다.

그럴 면 훨훨 나는 새가 되고 싶고,

나뿐만 아니라 우 가족 모두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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