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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Jan 11. 2024

엄마를 방치했다


엄마 뭐 해?


1. 그냥 있다.

2. 병원이다.

3. 청소한다.


세 개중에 오늘은 뭘까?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엄마의 문자실력도 확인할 겸 카톡을 날려본다. 지나간 일출과 찍어 두었던 철 모르는 꽃, 사진과 마루의 궁둥이 실룩 사진을 보냈다.



어디 나갔어?라는 물음이 돌아온다.

엄마도 어디 나가고 싶으실 텐데, 다리가 영 시원치 않아서 요즘은 병원 말고는 잘 나가시지 않는다. 궁둥이 실룩거리는 마루한테 대리만족을 느끼시며 마루가 신나 보인다고 하신다. 집이 근처에 있다면 딸 가게에 마실도 나오시고 점심도 같이 먹고 좋을 텐데 서로 뿌리내린 땅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래된 고목 같아서 안타깝다. 평생 살갑지 않은 남편과 재미없게 살았는데 딸도 지 아빠랑 똑 닮아서 재미없고 엄마의 복불복은 너무 엉망이다.

오늘은 병원을 거쳐 은행 들려 동네 시장까지 거쳐 집에 오시는 길이라 하신다. 공인인증서가 나왔다가 사라지는 21년 동안 모바일 뱅킹은 한사코 손사래 치시며 여전히 은행 창구로 가셨다.  엄마는 종이 통장에 거래내역이 찍히지 않으면 불안하시다면서 꼭 은행을 가셨다. 편리함을 제대로 알려드리지 못한 탓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공인인증서 발급받아서 내가 관리해 드렸는데, 갱신 시점이 되어 갱신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정보동의 인증을 받아야 하거나 평일에 함께 있을 때 처리 가능한 일들이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내동댕이 쳐버렸다. 


세상의 편리한 도구들을 써먹는 방법들을 연결해드리지 못했다. 엄마가 요즘의 키오스크 주문은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다. 그런 음식점에 가서도 주문을 넣기 바빴지 찬찬히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의 취미와 꿈을 찾는 방법을 자식이 조금씩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그걸 하지 못해서 엄마는 삼시세끼 수발드는 데에만 인생을 써버렸는지 모른다.


엄마의 하루는 재미날까?

혹여나 심리적으로 고통스럽진 않을까?

엄마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

엄마와 나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자꾸만 잊는다.


엄마의 인생에 재미라고는 없었다. 엄마를 위한 시간과 에너지의 투자 같은 것이 엄마에겐 왜 없었을까. 애초에 그런 걸 가지지 못해서라고 하면 슬프고, 타고난 시대 탓이라고 하면 억울하다. 엄마에게 돈과 시간이 있었다면 달랐겠지?



엄마 요즘 어때?

이제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은 없어?​

엄마의 답은, "그냥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그 말이 아주 아팠다. 내가 엄마를 방치했구나.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은지가 오래되어 이제 뭐가 좋은지 그런 생각조차도 잊었다고 하신다. 사실, 묻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았던 답이라서  묻지 못했다. 내가 해드릴 근사한 답이 없으니 시원스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곁에 젊은 자식이나 손주들이 버글거려야 어른들도 심리적으로 젊어질 수 있는데, 요즘 같으면 곁에 있지 못해서 불효가 되는 것 같다. 손주가 와도 스마트폰 들여다보느라 얼굴의 눈, 코, 입을 제대로 못 보기도 한다.  집에 갈 때가 되어서야 할머니 옆에 서보고는 '내가 더 크네' 소리를 했다.


자신과 온라인의 이웃님들에게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좋은 기운 가득한 하루 보내세요'라며

긍정적인 말을 잘만하면서

부모님께는 그러지 못했구나!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서로 언어가 너무 다를 수 있다. 이해가 다르고 기대가 달라서 일부러 거리를 두고 지냈었다는 얼마간의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은 어느새 나와 남편과 아이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반려견 마루도 그 카테고리 안에 있는데, 같이 먹고 같이 자지 못해서 식구에서 멀어진 것 같은 부모님이 그렇게 내게서 조금 밀려나 있었다.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처지란 죽어 있는 눈을 보는 것이었다.

 젊었던 엄마, 아빠 생각이 많이 난다. 두 분도 그렇게 젊고 푸르렀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늙는다. 시간은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지난다.  분의 노년을 자식으로서 어떻게 그려가야 할지 고민 중이다.


나의 성장을 위해 자기 계발서를 읽다가 5년 뒤, 10년 뒤의 나에 대해 명확하고 큰 꿈을 그리라는 조언을 받고 그러한 것들을 써보았다. 내 나이는 황혼빛이 되어 있고  아이의 나이는 초록이 무성한 숲이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나이는 '무'로 돌아가고자 했다. 10년 뒤엔 부모님이 이 작은 숲의 거름이 되어있을 생각을 하니 조급해진다.



죄송해요~ 엄마

엄마의 "니나 잘살면 되지~ "라는 말을

너무 완벽하게 지키고 살았나 봐요. 조금 늦었을까요...



후에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 안과 겉>의  글을 읽으며 쓸쓸한 노후를 실감했다. 같은 집에 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몸짓, 숨으로 서로의 필요를 알아버리는 부모님이 느껴졌다. 너무나 적막해서 두 분 사이에 비어버린 사운드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슬펐다.


저들은 그를 침묵과 고독속에 던져버렸다. 머지않아 그는 죽는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 안과 겉 - 아이러니> 중에서


늙은 마누라와 마주 앉아, 오래오래 씹으면서, 머리는 멍한 채, 죽은 것 같은 눈길로 한 군데 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없이 하는 저녁식사를 좋아했다. 오늘 저녁에는 다른 때보다 귀가가 늦어질 것 같았다. 차려 놓은 저녁 식사는 식어 버렸을 테고, 마누라는 그가 예고 없이 늦어지곤 하는 것을 아는 터라 걱정도 하지 않고 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이럴 때 그녀는 말하곤 했다. “달 속에 빠졌군.” 그걸로 할 말은 다한 것이다.'

...


이제 그는 고집스럽게 나아가는 제 발걸음에 실려 취한 듯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혼자였고 늙었다. 한 생애의 끝에 이르니 노령의 비애가 구역질이 되어 돌아온다. 만사는 결국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처지로 귀착된다.


그는 걷는다. 어느 길모퉁이를 돌다가 발부리가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다. 나는 그를 보았다. 우스꽝스럽지만 어쩌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길거리가 차라리 더 낫다. 집에 들어서면 열이 올라 늙은 마누라는 눈앞에서 지워지고 자신은 방구석에 혼자 처박히는 그 시간들보다는 차라리 길거리가 더 낫다.


사실, 갈 데도 없다. 영영 늙어 버린 거였다. 사람들은 장차 다가올 노년 위에다 인생을 건설한다.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포위된 그 노년기에 이르면 한가로움을 얻겠다고 기대하지만, 그 한가로움은 노인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사람들은 은퇴하여 조촐한 별장에서 살겠다고 작업 감독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일단 노년 속에 갇혀 보면 그게 틀린 생각이란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의 경우,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어야 했다. 


이제 길거리는 더 어두워졌고 인적도 드물어졌다. 아직은 그래도 더러 말소리가 들렸다. 저녁나절의 야릇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 목소리들은 더 엄숙하게 들렸다. 도시를 둘러싼 언덕들 너머로 아직 낮의 잔광이 비껴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한줄기 연기가 나무들이 무성한 언덕 꼭대기 뒤로 거창하게 나타났다. 천천히 피어오르던 연기는 전나무처럼 층층이 포개졌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도시의 웅얼대는 소음을 싣고 사라져 가는 삶과 하늘의 무심하고도 멍청한 미소 앞에서 혼자, 망연자실한, 벌거벗은 존재인 그는 벌써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노모생각 #노인의하루 #엄마생각 #부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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