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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리운 날엔 짝짝이 양말을 신어

©기이해 | 오늘의 소설 3

by 기이해


알리스! 언제 왔어?
방금 도착했어. 아이들을 떼어놓고 오느라 정신이 없었어. 해나, 이게 얼마만이야! 너는 언제 도착한 거야?
아.. 오늘 새벽에 공항에 도착했어. 오늘이라도 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벌써 8년이 흘렀구나.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동창 알리스, 디엔, 마이크, 그리고 해나. 오늘 여기에 모두가 모였다. 여기는 린지 로빈슨의 묘지 앞. 우리는 린지 로빈슨의 8주년 추도식을 위해 모였다. 뒤늦은 인사를 늦게나마 마음속으로 전했다.


안녕, 린지!
잘 지냈어?
미안. 내가 너무 늦게 왔지.

그곳은 어때?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그동안 나만 해외에 살고 있어서 참 많이 늦었다.


-해나-





린지 로빈슨. 해나에게는 여전히 너무 그리운 이름이다. 이 곳에 알리스, 디엔, 마이크, 해나까지 모두 모였는데 린지만 이 포근한 잔디밭 아래 잠들어있다. 해나는 해외에 머무르고 있던 탓에 8년 전 린지의 장례식에 그녀만 참석하지 못했다.


마이크는 다른 룸메이트가 있었지만 10년 전 나머지 네 사람은 모두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해나와 알리스는 쉐어룸에서 지냈고 다른 방에 디엔과 린지가 살았다. 방은 꽤 컸다. 방의 앞 뒤로 배치된 넉넉한 사이즈의 침대 2개, 넓은 책상 2개. 대학생활을 하기 넉넉한 장소에 마음도 넓은 룸메이트를 만났다. 알리스, 디엔, 린지 이렇게 세 명은 모두 같은 린든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해나만 이 친구들을 이 아파트에서 처음 만났다.


알리스와 디엔은 좋은 룸메이트였지만 사실 해나는 처음에 린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새침데기 같은 외모에 부잣집에서 버릇없이 자란 아이 같았다. 아침엔 분명 짧은 머리였는데 엄마를 졸라 갑자기 길게 늘어트린 붙임 머리를 하고 나타났고 주말이면 마이크의 친구들까지 불러 거실에서 밤새 떠들며 기타를 치고 놀았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해나와는 달리 린지는 너무 시끄러웠다. 깔깔거리며 웃는 것을 좋아했고 매일 저녁 새로운 상대와 데이트를 했고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에게는 관심 없는 듯 가끔은 무례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린지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는데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을 신었을 때는 '왜 저러지?'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어쨌든 린지는 해나와 무척 다른 사람이었다.


뭐랄까...
친구이지만 가깝게 지내고 싶지는 않은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알리스 덕에 4명 모두 주말 저녁이면 알리스의 부모님 집이나 디엔의 집으로 저녁 초대를 받아 함께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놀고 사진을 찍었다. 해나는 여전히 린지의 버릇없는 행동을 보고 고개를 흔들긴 했지만 어차피 두 학기를 마치면 여름 학기엔 린지가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두 학기 내내 종종 린지의 제멋대로인 행동들과 여러 명의 남자들을 갈아치우는 장면까지도 모두 견디면서 말이다.


모두가 영원히 함께 지낼 것 같았던 겨울, 봄학기를 마치고 알리스와 디엔은 여름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부모님 댁으로 돌아갔고 린지는 영국 맨체스터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그 사이 린지는 프린스 차밍 같이 생긴 남자와 약혼을 했고 교환학생을 마치면 린지는 결혼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학기가 지나고 새로운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서 쉐어룸이 불편했던 해나는 개인룸에 들어갔고 알리스는 같은 아파트에 디엔은 한 블록 떨어진 아파트로 린지는 결혼으로 각자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했다.


모두 가끔 페이스북으로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따로 만날 일이 없어 잘 살겠거니 하며 지냈다. 졸업반이 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알리스가 해나에게 연락을 했다.


해나, 주말에 시간이 나면 함께 린지를 보러 갈래?


린지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뇌종양이 재발했다고 했다. 알리스는 해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린지는 고등학교 기간 동안 뇌종양으로 고생 중이었는데 수술을 해서 가까스로 완치 판정을 받았어. 해나 네가 룸메이트로 처음 오던 날 그동안 투병생활 때문에 길러보지 못한 긴 머리를 미용실에서 엄마로부터 드디어 선물을 받기도 했지.

린지는 뇌종양 완치 판정을 받은 후에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했고 많이 웃었어. 행복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린지는 열심히 공부했고 지구 반대편으로 가서 새로운 세상도 보려고 했어. 최고의 남편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 그런데 이번에 뇌종양이 재발을 했고 말기라고 하더라고.
우리 린지를 보러 가지 않을래? 디엔과 마이클도 함께 갈 거야.


알리스가 이 상황을 알려주기 전까지 사실 해나는 린지의 마음을 알아본 적이 없었다. 친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해나는 그동안 린지에게 왜 더 잘해주지 못했나 하는 반성의 시간을 보내며 린지를 방문하러 가기 전까지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다.


소식을 듣고 모두 함께 린지의 집으로 향했다. 린지는 부모님의 댁에 있다고 했다. 해나는 함께 살 때 린지의 엄마를 본 적이 있었다. 문을 열어준 린지의 남편은 표정이 없었고 린지의 엄마는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곧 린지를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네 사람 모두 린지를 오랜만에 만났다. 린지의 키는 그대로인데 해나가 알던 린지의 상큼했던 건강미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조금씩 린지의 시간을 가져가고 있는 듯 매우 수척해 보였다. 탄력 있고 발그스레하던 볼은 이미 푹 꺼진 지 오래였고 린지의 잘록한 허리와 이어져 있던 히프도 볼륨이 없어져버렸다.


알리스가 이 어색한 공기를 없애려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알리스는 우리가 룸메이트로 함께 살면서 찍었던 사진들을 꺼냈다. 주말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린지, 우리가 함께 살던 아파트 앞 잔디밭에서 함께 찍은 사진들, 친구들과 함께 보러 갔었던 크리스마스 라이트 점등식, 매주 일요일 룸메이트 저녁식사 모임, 수제 아이스크림 만들기 등 우리는 함께 같은 공간에서 많은 추억들을 나눴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해나의 눈이 조금씩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빨리 눈물을 없애버렸다. 지금 이 상황을 린지보다 자신이 더 슬퍼하면 왠지 안될 것 같아서...


갑자기 디엔이 해나의 발로 시선을 옮겼고 해나가 신고 온 짝짝이 양말을 보며 말한다.


해나! 너 양말을 왜!


디엔은 '초대받은 집에 뭘 신고 온 거야?'라고 해나에게 말하는 것 같아 보였다. 마이클도 알리스도 린지도 동그래진 눈동자로 모두 해나의 양말을 모두 쳐다봤다.


해나는 빙그레 웃으며 친구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For Linsey!



당신이 그리운 날엔 짝짝이 양말을 신어 마침.

브런치작가©기이해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자주 짝짝이 양말을 즐겨 신었고 마지막까지 병중에서도 가족들과 해적 놀이를 즐겨했던 친구. 지금은 고인이 된 린지 로빈슨에게 이 글과 그림을 바칩니다.


©기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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