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인 어른은 살아남은 어린이다. 브런치작가©기이해
브런치작가©기이해
동심: 살아남은 어린이가 되기
나는 언니와 2살차이 이지만 부모님은 나를 학교에 빨리 들어가게 하려고 출생신고를 일찍 하셨던것같다. 언니가 하는 좋은건 다 해보고 싶었던 아이, 그게 어린시절의 나였다. 언니가 남색 유치원복과 유치원모자를 쓰고 등원할 때, 그게 그렇게 부러워서 내가 유치원을 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도 언니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모자를 쓰고 같은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유치원 교복이 무슨색이었는지 단추가 어디 달려있었는지 모자는 어떻게 생겼었는지 지금도 기억할 만큼 나의 유치원복은 정말 예뻤다.
그때는 세상이 그리 흉흉하지 않아서 요즘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같은 시스템처럼 직접 아침에 차로 데려가고 끝나면 집 문앞에 데려다주는 door to door 시스템은 없었다. 언니와 함께 30분 남짓 되는 기차길 근처를 걷다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면 유치원이 나왔는데 엄마는 우리의 유치원 길을 동행하지 않으셨다. 요즘의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땐 여섯살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맛에 유치원을 가는 그 길마저 무척 재미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동화책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진 어른이 된 나는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걸 다시 이해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내 어린시절의 재미있던 기억을 되살려보기로 계획하고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유치원때의 나를 발견했다.
유치원에서는 엄마와 함께 떠나는 소풍을 계획했고 나는 엄마와 같이 달리기도 하고 양파링 과자 따먹기도 했다. 대롱대롱 줄 위에 달려있는 양파링을 따서 먹으려면 까치발도 들어야하고 자연스레 손도 올라가는데 언니의 옷을 물려입었던 터라 손을 올리면 치마도 함께 올라가는 희안한 치마였다. 무척 짧았지만 '흰색 스타킹 정도는 신었으니까 그리고 그땐 꼬마였으니까... 괜찮아'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왠지 창피하다. 그리고 지금도 어린시절 입었던 저 옷뿐 아니라 어릴 때 즐겨입던 옷들이 종종 생각나는것을 보면 나는 어린시절부터 옷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유치원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있었던 것 같았다. 토끼 분장을 하고 노래에 맞춰 깡총깡총 뛰기만 하면 되는 발표회였는데 흰색 목티와 흰색 바지를 입었었고 엉덩이에는 엄마가 붙여주신 토끼 꼬리 실뭉치를 달고 토끼 머리띠는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직접 만들었었다.
어른이 되면 세월의 무게가 계속 어깨를 짓누르게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어디에서 살아야 하지? 내일 공과금 내는 날인데! 이 프로젝트는 오늘까지 마무리 해야 해! 라는 압박감을 종종 느낀다.
이러한 스트레스 가운데세서 동심을 잃지 않고 살려면 아직 영.유아기인 친구의 아들 딸 들을 보고 영감을 얻거나 나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아무런 근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던 내 어린시절의 사진들을 찾아 나 자신을 동심으로 데려가보곤한다. 그리고 나의 어린시절을 직접 그려본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나도 보통의 꼬마들처럼 많이 웃었구나,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구나~ 하며 안도감을 가졌다.
아이들은 원래 먹고, 자고, 노는게 일이다. 혼자 있어도, 부모와 있어도, 누군가와 있어도 계속 놀아야 한다. 어른들이 매일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있듯, 그렇게 노는게 꼬마들의 일이다. 손가락으로 놀고, 만지고, 보고, 듣고, 맛보고 익히면서 어린 아이들도 자신의 경험을 쌓아간다. 그 경험들이 나중에 아이들이 어떤 감성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밑거름 같은 역할을 하게되기 때문이다.
평소엔 그렇게 졸립던 아침인데도 일요일 아침만 되면 졸린눈을 비비고 일어나 TV 앞으로 가서 이른아침 시작하는 만화동산을 켜면 언니도 동생도 한걸음에 달려나와 어느새 함께 TV속으로 가서 만화의 주인공이 된다.
지금은 휴대폰으로 쉽게 게임을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닌텐도나 플레이 스테이션이 나오기도 한참 전인 겜보이가 유행하던 시절, 설이나 추석때 사촌들이 게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우리집까지 들고왔다가 게임의 맛을 덩달아 알게된 나는 무식하게 생긴 빨간색 조이스틱과 오랫동안 친구를 먹었다.
요즘 아이들은 미세먼지 때문에 밖에서 놀 수 있는 날들도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어릴적 나의 기억들은 엄마가 저녁때가 돼서야 "OO야, 이제 들어와 저녁먹어야지~" 라고 하실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집 앞에서 자주 하던 한발뛰기, 숨바꼭질, 땅따먹기, 고무줄 놀이, 공기놀이,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지우개 따먹기 등등 할 수 있는게 아주 많았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어린아이처럼 많이 놀아야 한다. 눈으로 보고 담아보고, 실패해도 실험해보고 또 해보고, 좌절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것을 하면서 말이다.
걱정과 근심을 도대체 어디에 써먹는지 모르던 어린시절의 내 형제들은 엄마가 마음이 아주 속상했던 날이었던 줄도 모르고 엄마가 바람을 쐬러 가자는 말에 기차를 타러간다고 좋아만했다. 지금은 그곳에서 엄마 표정까지 기억이 나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 알면서도 일부러 엄마가 우리를 보고 더 웃어주셨으면 하고 더 웃어버린건 아니었을까? 교외선을 타고 내려 가을 볏짚만 덩그러니 남은 볼품없었던 허허벌판에서 깔깔거리고 웃고있는 우리들을 보며 엄마는 그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걸까? 아마도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건 아니었을까?
동심이라는건 걱정과 근심이 잊혀져야 볼 수있는 마음이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 그래서 더욱 소중한 그때지만 어른이 된 나는 다시 어린이가 되기 위해 그 시절의 기억으로 들어가고싶다. 어린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살아남은 어린이가 되기위해서 어린시절 내가 듣고, 보고, 만진것들을 다시 기억하게 되면 언젠가는 나도 어릴적의 그 동심을 내 마음속으로 다시 가지고 올 수 있지 않을까?
창의적인 어른은 살아남은 어린이다
어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로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변의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고 그들을 관찰하는 일, 그리고 어린시절의 나를 가끔씩 꺼내보면서 나도 그렇게 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