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여가생활 in Seoul (feat. 독일의 숲)
한국에 사는 백로보다 유럽에 살고 있는 백조가 좋고 굽이 굽이 힘들게 올라야 하는 산보다 그냥 단순하게 평평한 숲이 좋은 나는 아직 정신을 더 차려야 할까? 그런데 어쩐지 백조만 보면 천국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단 말야.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동화에서 백로는 나오지 않았거든.
일 년 전 오늘의 나는 독일 함부르크의 엘베강에서 백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은 모두 여가를 잘 즐긴다. 독일은 휴일도 많지만 휴가 또한 길게 낼 수 있어서 그런지 내가 보기엔 독일 사람들은 슬기롭게 여가를 즐기고 잘 놀 줄 아는 민족인 것 같아 보였다.
함부르크에서는 날이 좋으면 사람들은 길고 긴 엘베강 근처로 모여든다. 그동안 내가 머물렀던 공원 중 제일 넓고 아름다운 공원 Winterhude에 있는 Stadtpark라고 하는 곳의 경치는 평온 그 자체였다. 이렇게 큰 공원이 집과 가까우면서도 큰 호수가 있고 백조가 많이 머무는 곳, 바로 천국에 온 것 같았다.
독일은 산이 많이 없는 대신 숲이 많다. 굳이 산을 오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다양한 동물들, 비가 오면 더욱 피어오르는 풀과 나무 향기, 물과 아름다운 새소리가 어우러진 자연을 마주할 때면 내 마음은 살랑살랑 간지러웠다.
반대로 한국은 산이 많고 숲은 별로 없다. 울퉁불퉁 오르락내리락 숲이 아니라 대부분이 평지인 커다란 숲 말이다. 한국에는 저런 숲이 유명한 휴양지나 관광지에나 있으려나 도심 한가운데서 뉴욕 센트럴파크의 규모나 Stadtpark 같은 숲을 보기란 쉽지 않다. 서울에겐 물론 서울 숲이 있지만 사는 곳과 서울 숲까지 거리가 멀어 그곳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공원은 집 가까이에 있어야 접근성도 좋고 터덜터덜 걷다가 집으로 갈 수 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Stadtpark는 평지에 있는 웅장한 큰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호수에는 백조도 살고 거위랑 오리도 산다. 이 호수는 길고 긴 엘베강과 연결되어있고 함부르크 중앙역과 가까운 Jungfernstieg에서 탈 수 있는 유람선이 이 곳까지 왔다가 되돌아간다.
나도 이 곳에서 여느 독일인처럼 일광욕을 하기 위해 이 공원을 찾았다. 혼자 혹은 엘리자베스 할머니와 함께. 아주 더운 여름에는 할머니와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산책을 했다. 가을엔 색이 변해가는 나뭇잎들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마음 편히 여가를 즐기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 그때의 내 마음속은 비자 문제로 무척 시끄러웠다. 내가 이 나라에 얼마나 머무를 수 있을까? 한 달 뒤의 체류기간이 불안한 상황이었기에 눈은 아주 즐거웠지만 머리와 마음이 온전히 휴식을 즐기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치라도 보지 못했다면 내 마음은 더욱 피폐해지고 삭막해졌을지도 모른다.
시끄러웠던 내 마음과는 다르게 이 공원에서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애완동물들을 가만히 지켜보니 주인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고 있는 동물들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난 보살펴 주는 이 하나 없이 어려운 길을 가고 있을 때 공원에서 산책하며 애완견들을 만났다. 독일 사람과 같은 여가를 보내고 있고 표정이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애완동물들 말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여가를 나는 왜 온전히 즐길 수 없을까? 그냥 부러웠다. 주인과 산책하고 있는 애완견 마저. 혹시 다음 생이 있다면 난 반드시 독일에 사는 애완견으로 태어나겠다 다짐하면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던 기억이 난다.
얼마의 기간이 지나 독일에서 어렵게 예술가 비자를 2년이나 받아놓고도 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 공항 밖에서 다시는 마실 수 없는 독일의 신선한 공기를 마지막으로 여러 번 최대한 많이 마셨다. 미세먼지로 얼룩진 서울에 가면 독일의 이 신선한 공기를 다시는 마실 수 없을 테니까.
홍대 가까이에 살고 있는 나는 연트럴파크를 지나쳐 홍대로 자주 걷는다. 홍대에는 대부분 미술 재료를 찾기 위해 가는데 연트럴파크를 가로질러 다닐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1년 전만 해도 공원을 걷는데 최대 2~3시간이 걸리는 Stadtpark를 걷다가 이렇게 좁디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연트럴파크를 지날 때마다 드는 느낌은
답답하다
애초에 그 연트럴파크 자리는 내 어린 시절 언니와 손을 잡고 유치원을 등교하던 철길이었고 나의 청소년 시절 등굣길이기도 했다. 철길이 길기는 하지만 넓지는 않지. 경의선 책거리는 문화공간이라 사람들이 많아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홍대부터 연남동으로 이어지는 공간에 공원을 만든 것은 자연스럽게 철길이 사라지면서 주변 주민들을 위한 휴식의 장소로 만들어졌는데 그 좁은 곳에 주민들의 편의시설로 사용되기보다 어느 순간 힙스터들의 성지가 되었다.
좁은 공간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겐 연트럴파크에 이렇게라도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여전히 돗자리를 깔고 앉아 개인과 개인이 방해받지 않는 최소한의 거리 혹은 공간 (personal space)을 보장받지 못한 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무척 안돼 보였다. 이왕 만드는 거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아니면 공간대비 인구가 많은 것을 탓해야 할까? 언젠가 뉴욕에서 잠깐 한국으로 놀러 온 지인과 그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이 공간에 대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여유공간 없이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다고 말했다.
대부분이 주민들로 이루어진 휴식공간이었다면 어쩌면 그 공간이 넉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뉴욕 센트럴파크는 크기라도 크지,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행인들과 많이 부딪혔다. 잔디 밭도 거의 죽어 흉한 모래밭이 되어버렸다. 맨발로 걸을 수 있어야 비로소 잔디의 맛을 볼 수 있는데 너무 좁은 곳에 돗자리를 깔고 장시간 사람들이 잔디를 괴롭혀서 잔디가 자랄 시간이 없다.
내가 휴식을 취하면서 다른 이의 휴식을 방해한다면 과연 옳은 일일까? 연트럴파크 주변 연남동 주민들이 그들의 거주지역에서 사람들로 인한 소음으로 괴로워하지 않도록 그리고 연남동에서 푸르른 잔디를 다시 볼 수 있도록 이제 연트럴파크는 연남동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조금 더 넓은 공간으로 이동해 본다면 어떨까? (참고로 저는 연남동 주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연트럴파크 상권엔 죄송) 분명 서울 어딘가에 잔디를 볼 수 있는 다른 공간도 많을 테니까. 서울 숲이나 한강 공원 등등... 말이다.
최근 서울에 이 답답함을 조금 날려 줄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 서울시에서 최근 개장한 노들섬이다. Stadtpark처럼 숲도 있고 물도 있다. 가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어서 아쉽지만 아직 피크닉이 가능하고 날 좋으면 도시락과 담요 혹은 돗자리를 준비해오면 일광욕도 할 수 있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노들섬으로 모여든다. 자연과 함께 음악과 책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큰 나무들이 있고 넉넉한 잔디밭이 있고 비로소 여유가 보인다. 노들섬 둘레길이 완성이 되면 섬 안에 마련된 숲으로 들어갈 수 있어 무척 기대가 된다.
서울에 이런 공간이 더 많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곳이 여러 군데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지니까. 그리고 서울뿐 아니라 한국 어디든 숲이 더 많이 생겨야 하는 이유는 한국이 안 그래도 살기 쉽지 않은 곳인데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도 더 많이 생겨나야 사람들이 여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공간을 보고 영감을 얻고, 마음이 바쁜 사람들은 이런 경치라도 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을 테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은 모두 모두 노들섬으로 한꺼번에 모여들어 연트럴파크처럼 노들섬의 숲이 불편해지지 않기를, 자연을 지켜내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기를, 부디 서울 시민들이 슬기롭게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공원의 넓이도, 사람들의 마음도, 근무 시간도 모두 여유가 넘치는 서울이 되길.
* 노들섬에서 주의사항
1. 주차가 불가합니다.
처음부터 대중교통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합니다. 되도록 대중교통으로 와 주세요. 주차는 다리 건너편 공영 주차장이 있어요. 한강대교 위의 경치를 살살 걸어보며 노들섬에 도착!
2. 맛있는 음식이 없어요.
식당이 2~3개 있긴 하지만 제게는 잘 안 맞아요.(개인 의견임) 노들섬에 샌드위치 가게가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도 많으니 도시락, 브런치 바구니랑 담요 혹은 돗자리 들고 오세요. 섬에는 약국이 없어서 혹시 가족단위로 나들이 오실때 아이가 뛰어놀다 들판에서 다칠 수 있으니 밴드같은 비상용품을 가지고 오시면 좋아요.
3. 노들서가 2층 작가의 서재
노들서가의 2층에 만들어진 작가의 서재는 저녁 7시까지 브런치 작가들이 머무는 공간이에요. 하지만 평일 저녁 7시 이후 ~ 저녁 10시와 주말 모든 시간은 시민을 위해 개방합니다. 집필하는 작가들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불편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4. 자연을 지켜주세요.
노들섬의 자연이 참 아름다워요. 누구나 이 아름다운 섬을 볼 수 있도록 자연을 지켜주세요. 텐트 설치는 불가능합니다.
5. 공공 에티켓
공공시설, 에티켓을 지키는 당신 멋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