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나는 어둠과 동화되어 있었다. 손을 움직여도 움직이는지 알 수 없었고 계속 걸어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긴 어둠 속에서 나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얼마간 울었는지 모를 만큼 긴 시간이 흘렀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서 위를 봐 달이 빛나고 있어." 나는 눈물을 닦아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달은 반딧불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슬픔을 잊을 만큼 달을 바라보고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 위해 뒤돌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둠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왼쪽눈을 비춰서 잠에서 깼다.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며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열 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나 이불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갈증이 심해서 싱크대에 씻어놓은 컵을 가져와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 컵에 두 번 따라 마셨다. 그러고 나서 거실에 있는 소파라기도 민망한 곳에 앉아 리모컨으로 티브이 전원을 켰다. 항상 이 시간대면 볼만한 게 없었지만 혹여나 있을까 싶어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예상대로 재미없는 프로그램만 있었다. 나는 티브이 전원을 끄고 옆에 있는 선풍기를 틀면서 요 며칠 전 헌책방 카운터를 보며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딘가 기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묘한 어떤 것이 공통적으로 묶여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떤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저절로 감기는 눈에 저항하지 않고 잠을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놀란 눈과 어지러운 머리를 잡고 문밖으로 누구세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나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비였다.
"대파를 사 온 것도 잊어버리고 그대로 방치해 두는 일이 잦았어.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생각이 나서 보면 녹색 부분이 말라비틀어져 있는 거야."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이따금 도로를 지나가는 사람도 보였다.
루비는 식탁에 앉아 손목을 이용해서 컵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컵 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고양이 같았다. 그녀는 지루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컵 안의 일렁이는 것을 보며 말했다.
"그런 경우는 흔해, 나도 종종 겪는 일인 걸 뭐, 아까워도 달리 방법이 없잖아. 먹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마른 부분을 잘라내고 쓰는 거지. 물론 채소를 안 산지 오래됐지만. 그런데 언제 요리해 줄 거야? 나 꽤 오래 기다리고 있어. 몹시 배고파."
나는 식탁에 미끄러지듯 팔을 뻗으며 말했다.
"십 분만 있다가. 움직이기가 너무 귀찮아. 그러게 왜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거야.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문을 열어주지 않고 없는 척할 수도 있었어."
루비는 내가 하는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 지루하다며 한편에서 약풍으로 돌아가는 선풍기를 버튼을 눌러 강풍으로 바꿨다. 그러고 나서 얼굴을 선풍기에 갖다 대어 "빨리해 줘"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집안은 루비의 목소리와 선풍기와의 합작으로 기괴한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나는 시끄럽다며 소리쳤지만 루비는 "네가 해주는 게 늦어서 그래."라고 말하고는 멈추지 않고 더 크게 말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있는 채소를 가져와 거실로 향했다. 루비는 그 모습을 보고서 안심했는지 약풍 버튼을 누르고 소파에 몸을 기대어 옆에 놓여있던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 채널을 넘겼다.
나는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귀 한쪽을 열어둔 채로 채소 손질을 했다. "뭐 만들어 줄 거야?" 하고 루비가 말했다.
"간단하게 계란말이. 감자조림. 큰 기대는 하지 마. 그리고 지금 보는 건 동물 다큐멘터리야?" 내가 물었다.
"볼만한 게 이것뿐이라 틀어놨어. 이따금 이런 것도 보거든 재밌어. 생각 없이 보기에 참 좋아. 어릴 땐 참 싫었는데 취향은 변하니까."
나는 대파를 자르고 감자칼로 감자껍질을 깎고 물에 씻어 사등분으로 잘랐다. 그러고 나서 접시에 담아 랩을 씌우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살짝 익혀 준 뒤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감자를 넣어 볶다가 간장과 물 그리고 올리고당을 조금 넣어 조렸다. 그다음 그릇에 계란을 풀어 소금 간을 하고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물을 넣어 계란말이를 했다. 나는 접시에 담기 전에 감자조림에 어슷 썰기로 썰어놓은 파를 뿌렸다.
"네가 내 남자친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배고프다고 하면 밥도 차려주고, 어머 저 애 결국 굶어 죽나 봐 계속해서 사냥을 실패해. 가엾은 치타."
티브이에서는 내레이션으로 사냥에 허탕 치는 치타에 대한 음성이 들렸다.
"그 얘기 팝콘이 들으면 몹시 서운해할 거야. 치타? 어쩔 수 없지 자연은 냉정하니까. 나는 내가 더 가여워."
"차라리 들었으면 좋겠어. 걔는 너랑 성격부터 전혀 다른데 둘이 어떻게 친구가 된 거야?"
"어쩌다 보니까."
나는 음식을 접시에 담고 컵에 물을 따랐다.
루비는 "만약에 방금 봤던 굶은 치타가 내 옆에 있다면 네가 만든 감자조림을 줬을 거야. 너는 안 먹어?"
"생각이 없어. 그리고 치타는 감자조림을 못 먹잖아."
"배고프면 다 먹게 돼있어. 내가 산증인이야. 궁금하지 않아? 어떤 얘기일지?"
"전혀" 나는 루비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어릴 적에 콩이 엄청나게 싫은 거야. 그런 거 있잖아. 곡식이나 채소가 제철이라서 싼값에 대량으로 구매하는 시기 우리 엄마는 주로 강낭콩을 사 왔어."
루비가 눈을 보며 말했다. "너희는 없었어? 그런 경우."
"나는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 그나마 감자? 한 박스씩 사두고 먹었던 건 기억나"
"그래? 비슷하네 하지만 나는 죽어도 강낭콩을 먹기가 싫은 거야. 밥에도 들어가 있고 강낭콩이 들어간 반찬으로 가득하고 지긋지긋한 강낭콩을 젓가락으로 골라내서 먹었어. 밥에 들어있는 강낭콩은 엄마 밥그릇으로 옮기고, 그럴 때면 엄마는 '골고루 먹어야지!' 하면서 혼을 냈지만 나는 절대 입에 대지 않았어. 그날은 학교에 다녀와서 배가 꽤 고픈 거야. 근데 냉장고를 열어봐도 먹을 건 없고 배에서는 꼬르륵 대고 찾고 찾다가 식탁 구석에 올려진 강낭콩이 들어간 떡을 발견하고는 랩을 천천히 벗기고 냄새를 맡고 나서 와구와구 먹어버렸지."
"그래서 저 치타도 그럴 거라는 거야?"
"물론이지"라고 하며 루비는 젓가락을 들어 밥에 감자조림을 올려서 먹었다. 그러더니 맛있다. 하고 계란말이도 마저 먹었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려 볼 만한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자 루비가 더 보자고 말해서 동물 다큐멘터리를 다시 틀었다. 나는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저거 다 연출된 거겠지? 저 장면만 나오도록 유도하고 사실은 진실이 얼마 없을 거야."
"알고도 보는 거지 그리고 원래 삶은 저 미어캣만큼이나 힘들어. 매일 경계하고 먹을 걸 구하고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어."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낮부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그러자 루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해준 음식 생각이 나서. 기분 좋지 않아? 네가 해준 음식을 내가 맛있게 먹어주는 거. 뭐, 좋아. 밥값으로 조각 케이크 사줄게" 하고 루비가 말했다. 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지만 어떤 케이크를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릇이 비어져 나는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두고 루비에게 나가자고 했다. 루비는 오래전에 팝콘이 생일선물로 주었던 검은색 핸드백을 챙기더니 손으로 툭툭 치며 털었다. 그러고 나서 핸드백을 열고 콤팩트를 꺼내어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쳤다. 나는 루비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팝콘이 있나 없나 확인차 온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