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과는 초등학생 시절 여름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갑작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적당한 날씨에 뛰어도 땀은 나지 않고 아이스크림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다면 몇 개나 먹어치워 버렸을 그런 날이었다.
담임선생은 평상시 입버릇으로 '네가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으면 모든 걸 혼자 할 수 있어야 해'라며 자신의 번거로움을 덜어놓기 위해 의무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는데 무언가 질문을 하면 '혼자서 생각해 봐야지 네가 열한 살이 됐는데'라며 말하기 일쑤였고 나는 그녀를 보면 말문이 그대로 닫힐 정도로 변모됐다.
그 여선생은 항상 코를 찌르는 듯한 향수를 뿌리고 다녀서 지나가면 진흙탕의 바큇자국처럼 흔적이 한동안 남아있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향기였다. 실버 바탕의 안경을 쓰고 기다란 막대기를 갖고 다니며 (그녀의 막대기는 수업 시간에 칠판을 가리키며 지휘 용도로 쓰이는가 하면 말 안 듣는 학생 상대로 회초리로 탈바꿈되기도 했다.) 잘 웃지도 않아서 상대적으로 커다란 벽이 있는 어른이었다.
그날은 수업 시간이 시작된 지 십 분이 지나도 오지 않더니 곱슬머리의 아역배우 같은 남자아이와 함께 앞문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교탁 앞에 서서는 한편에서 소라고둥보다 작게 움츠리고 있는 그를 가리키며 내일부터 같은 학급에서 생활하게 된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는 칠판에 김재혁이라고 적고는 아빠의 일 때문에 이곳으로 전학을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전학교에서는 곱슬머리라 팝콘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므로 편한 대로 불러도 좋다고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의 소개가 끝나자 다들 왠지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렇게 팝콘과는 전학생으로 처음 만나게 됐다. 그런 그가 우연스럽게 내 옆자리로 배정됐고 그가 앉자. 나는 어색해서 가방을 책상 고리에 걸고 필기도구를 꺼내어 공책에 자질구레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팝콘이 다짜고짜 스티커를 내 쪽으로 밀더니 수줍게 웃으며 ‘엄마가 친구들에게 나눠주래서’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손을 슬쩍 봤지만 스티커는 서너 개가 전부였다. 아마도 말걸 구실을 만들어서 건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보며 고맙다고 말하고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무언의 거래로 우리는 친구가 됐다. 그는 첫인상과 거의 일치했다. 맞은 역할을 잘 소화하는 배우처럼. 나는 흥미도 없고 보기도 싫은 축구를 항상 즐겼고 공부도 곧잘 해서 깐깐한 여선생이 예뻐했다. 외모도 호감형이라 동급생 모두가 좋아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그가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고 있는 모습을 스탠드에 앉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서 땀을 흘리며 당장 공을 차지 않으면 이 세계가 끝이라도 날 것처럼 뛰고 있는 그를 보니 고장 난 심장을 억지로라도 움켜쥐고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잡화점을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후문으로 빠져나가서 아침에 받은 천 원으로 차가운 물과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돌아왔다.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흔들며 땀을 많이 흘렸으니 쉬었다가 하라고 말했다. 팝콘은 축구공을 배수로에 처박아 둔 채로 달려와서는 그늘에 가려진 스탠드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서 몇 방울씩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난 이제 슬슬 집에 가보려고 해. 너는?" 내가 그를 보며 말했다. "난 아직"팝콘이 말했다.
우리는 말없이 허공만을 바라봤다. 나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운동장에는 축구를 하거나 시소를 타는 집에 가지 않은 몇몇 초등학생이 보였다.
꽤 오랫동안 목석처럼 앉아있다 보니 학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에게서 울리는 매미소리가 귀에 익숙해졌다. 나는 매미소리를 듣기 위해 앉아있는 청중처럼 그 소리들을 다 받아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지독하게 울어댔다.
"연준이도 같이 축구를 하면 좋을 텐데" 하고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고 있는 팝콘이 말했다.
"공이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따라가는 게 재밌나? 땀나고 짜증만 나던데 앉아서 보는 거로 만족해 "
"그럼 너는 뭘 좋아해?"
"누나랑 컴퓨터게임을 하거나 멍멍이를 안아주는 거"
"누나?"
"친누나가 있어. 세 살 위. 너는? 외동인 거야?"
그러자 팝콘은 숨죽이고 두 손으로 아이스크림 막대를 공손히 잡고서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는 막대를 스탠드 옆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배수로에 떨어져 있는 축구공을 줍더니 발로 찼다.
나는 팝콘에게 먼저 가겠다고 한 뒤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 팝콘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그는 고민을 털어놓는 목소리로 잠깐 놀이터에서 볼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밤늦게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다고 말한 뒤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