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by 시기화

나와 루비는 <플랜 B> 카페에 들어갔다. 나는 루비에게 2층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아두겠다고 말했다. 루비는 알겠다고 말한 뒤 베이커리 쇼케이스 쪽으로 가서는 여러 종류의 조각 케이크를 유심히 봤다. 나는 루비의 뒷모습에 눈길을 떼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 통로 벽에는 희미한 빛이 내리쬐는 액자가 걸려있었다. 액자 안에는 고무타이어와 레몬이 그려져 있었는데 나는 왜 이 그림을 이곳에 걸어 두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2층으로 올라와보니 커다란 유리벽이 있었다. 건물 한쪽 면을 유리로 덧대어서 하늘부터 거리의 사람들까지 다 보였다. 다행히 자리는 구석에 앉아서 얘기하고 있는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 빼고는 텅 비어있었다. 커플 중 남성은 늘어난 검은색 반팔 티와 동일 색상의 반바지 그리고 컨버스화를 신고 있었고 여성은 짙은 색의 꽃무늬 원피스, 어두운 분홍색 플랫슈즈를 신고 있었다. 나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 거리를 감상했다. 한적한 탓에 두 사람의 대화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사소한 이야기를 하다가 분홍 돌고래 얘기를 꺼냈다. [분홍 돌고래?] 들어보니 역세권에 위치한 액세서리 가게 이름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다가 무료함을 느껴 창밖으로 보이는 신호등을 쳐다보았다. 초록불이 깜빡깜빡거려도 멀리서 두세 명이 다급하게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빨간불이 되기 전에 다 건너자 자동차는 도미노처럼 줄줄이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안 있어 다시 횡단보도 주변에는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였다.

창밖을 보는 도중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루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루비가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두며 말했다.

"음료와 케이크는 내 마음대로 골랐어."

테이블을 보니 접시에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와 치즈케이크 그리고 얼음이 들어간 유자차와 얼음이 들어간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었다.

"창가에 있는 자리로 잘 앉았네" 하고 루비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컵에 스트로를 꽂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나는 유자차에 손을 갖다 댔다.

"팝콘과는 연락 안 해볼 거야?” 루비에게 말한 뒤 손목시계를 봤다. 시간은 오후 세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루비와 나는 케이크만 포크로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루비가 말했다. “화가 나고 열받아. 내가 뻔히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연락도 없고 내가 어땠는지 알아? 밤새 기다리다가 얼떨결에 잠들었는데 순간적으로 깬 거야. 눈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어. 혹여나 문자라도 와 있나" 햇볕을 받으며 스트로를 입에 갖다 대는 루비의 모습이 갈증을 해소하는 기린처럼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네가 먼저 연락은 안 해봤겠지?"

"당연한 거 아니야? 먼저 연락하는 건 그날로써 여자의 매력이 소멸되는 거라고 그리고 먼저 연락할 때와 연락이 올 때를 기다리는 건 상황에 따라 다른 거야. 이건 연락이 와야 될 상황이고."

이때마다 루비에게 ‘연인끼리 그런 게 왜 필요해’라고 말해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질 수 없다는 듯 전혀 굽히지 않았다.

"나한테는 잘만 하잖아. 오늘도 막 들이닥치고."

"그거야. 편하고 재혁이랑 오래된 친구고 무엇보다도 눈치가 빨라서 좋아. 눈치라는 건 누가 가르쳐 준다고 해도 익힐 수 없고, 뇌 깊숙이 박혀있는 진동 바늘 같은 거거든 백날 힌트를 줘도 그 바늘 같은 게 없으면 절대 몰라."

"밀당하지 말고 궁금하면 연락해 봐. 걔는 네가 먼저 하든 안 하는 전혀 관심이 없을걸? 다섯 시쯤이면 내 휴대폰으로 연락해서 ‘술을 진탕 마시고 친구 집에서 잠들었어.’라고 말할게 뻔해"

루비는 ‘얽매여있는 건 정말 싫어’라고 말하더니 치즈케이크를 포크로 긁어냈다.

"내가 너라면 벌써 헤어졌을 거야. 뭐, 서로 비슷한 구석이 있으니 만나는 거겠지만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 법이거든."

우리는 말없이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구석에 있던 커플은 자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들이 있었던 테이블 위에는 구겨진 티슈만 남아있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생각난 듯 물었다.

"분홍 돌고래?라고 알아? 네가 오기 전에 저쪽에 앉아 있던 커플이 말하더라고"

"어. 들어봤어. 액세서리 가게야. 친구한테서 들었는데 그 가게에서 어떤 여자가 목걸이를 샀는데 좋은 일만 생긴다고 막 자랑하고 다녔대. 행운을 주는 목걸이라고 그게 퍼지면서 주인도 들었는지 작정하고 행운 목걸이라고 써 붙이고 판매한다던데?"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있어? 딱 봐도 팔려고 의도적으로 낸 소문 같은데"

"그걸 알아도 혹시나 하고 사보는 사람이 꽤 많아. 나 화장품 가게에서 일할 때 옆에 친구가 써보니 좋다고 말하면 대부분 믿고 사고 구매하거든 그게 무슨 심리라던데 군중심리?"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려서 슬쩍 보니 팝콘이었다.

나는 루비에게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안에 들어가 팝콘에게 온 문자를 읽었다.


[어젯밤 클럽에서 끝내주는 여자를 만났어. 지금까지 같이 있다가 헤어지고 너희 집 가는 중이야. 집에 있지?]

나는 한숨을 쉬고 [루비와 함께 플랜 B 카페 2층. 네가 와서 달래줘.]라고 보냈다.

곧바로 [o.k]라고 답장이 왔다.


나는 손을 씻고 거울을 보고 앞머리를 물기가 가득한 손으로 쓸어내리고 나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거의 다 먹은 케이크를 포크로 뒤적거렸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재혁이랑 통화했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온대. 너도 있다고 했고"

"지금 나도 연락하던 참이었어"

"왜 연락이 없었는지 물어봤어?" 내가 물었다.

"아니, 와서 자연스럽게 말하겠지. 여자의 매력은 원하는 대답을 유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하고 말했다.

나는 조금 지쳤다. 둘 사이에서 멍청하게 껴있는 기분이 들은 것이다. 갑작스레 짜증이 났다.

"재혁이 오면 집에 갈 거야. 너희 둘이서 데이트를 하건 얘기를 하건 마음대로 해" 남은 음료를 마시며 말했다.


한숨이 나왔다. 루비에게는 미안하지만 팝콘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 깊숙한 곳 어딘가에 커다란 도넛처럼 구멍이 뚫려있었다. 자연스럽게 사소한 시련을 겪으며 차츰차츰 넓어진 게 아니라 강제적으로 헤집고 끄집어내어 커다랗게 벌어진 구멍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 건지 그의 행동에서 내 머릿속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걸 봐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문제 지적이나 위화감 없이 넘어가고 받아들인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루비를 소개받고 같이 밥을 먹고 집에서 얘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셋이서 취해 널브러진 채로 침대에 잠들고 사소한 것들이 쌓여 친밀도가 올라감에 따라 감정에 변화가 생겼고 그것의 영향인지 그녀를 볼 때마다 '걔 너무 좋아하지 마. 너는 걔를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그럴 수 없는 건 팝콘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조금만 기다린 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헤어질 거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평온한 날씨의 날벼락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인 것이다.


커피잔이 울리는 소리가 퍼졌다. 삼십 분 정도 시간이 흐르자 2층으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밖을 보던 것을 멈추고 루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루비가 말했다.

"집에 갈 생각. 저 봐 네가 기다리던 사람이 왔어. 팝콘이 왔으니까 난 집에 가볼게." 나는 어색하게 들어오는 그를 보며 마저 말했다. "낮부터 네 여자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나를 괴롭혔으니까 제대로 복수해 주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데이트 잘하고 연락해'라고 말한 뒤 <플랜 B>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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