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되고 몇 개월이 지났다. 팝콘은 대학교 진학을 희망하지 않아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나는 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딱히 대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서 손쓸 틈도 없이 이곳에 와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의 의견에 거역할 수가 없었던 탓이지만 나도 정확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강의실 화이트보드 앞에서 교수는 디자인과 실용성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머릿속에 하나도 깊게 박히지 않았다. 그것들은 물을 잔뜩 먹은 한지에 붓을 휘두르는 것처럼 빠르게 희미해졌다. 같이 경청하고 있는 학생 누구라도 그렇게 느꼈을 지루함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손을 집어넣어 살짝 꺼내서 보니 팝콘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저녁 여덟 시 오십 분에 자기 집에서 맥주를 마시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 아까 답해주지 못했던 문자에 알겠다고 답신을 보내고 강의실 옆 휴게소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탄산음료를 골랐다. 나는 여느 때처럼 탄산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코끼리가 한 번에 많은 양의 물을 빨아들이듯이 멈추지 않고 삼켰다. 한 캔을 다 털어 넣고 나니 가슴속에 설산의 공기를 옮겨놓은 것처럼 해소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알루미늄 캔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옆 건물 도서관에 들려 간단히 읽을 만한 책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팝콘과 약속한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고 딱히 할 것도 없거니와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 것도 한몫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기초제도 교수를 만나 인사를 했다. 그는 검은색 상의와 검은색 바지. 무스를 바른 듯 유광이 있는 짧은 머리카락에 유난히 반짝이는 눈을 갖고 있었고 팔에는 클러치 백을 껴놓은 채로 인사를 받더니 '집에 가느냐. 과제는 다 해가냐.'라고 묻고는 홀연히 떠났다.
시간은 여덟 시 삽시 분 나는 팝콘의 집 앞에 도착했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자 ‘집 앞 슈퍼마켓에서 맥주를 사는 중이야. 곧 갈게.’라고 말해서 나는 ‘네 집 앞이야.’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봉지를 들고 뛰어오는 팝콘이 보여서 손을 흔들고 인사를 나누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팝콘의 방 전등 스위치를 누르고 가방을 내려놓고 구석에 있는 간이 테이블을 펴서 캔맥주를 한 캔씩 땄다. 안주는 감자칩이었다.
"네 부모님 언제 오시지?" 내가 말했다.
"삼일 뒤에 가는 길에 생활비 겸 용돈을 넉넉히 주고 갔어."웃으며 팝콘이 말했다.
"여행 간 곳이 유럽 쪽 이랬나? 너도 따라가지 그랬어. 못 간 이유가 아르바이트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었어?"
"프랑스 파리. 아르바이트 문제도 있고 같이 가기 싫은 것도 있고"하고 말하며 팝콘은 맥주를 마시고 감자칩을 먹으며 목부분을 긁으며 말했다.
"답답하지 않아? 거실로 옮기자 어차피 우리 둘만 있는데 좁아터진 내 방에서 마실 이유도 없고 눈치 볼 사람도 없어."
우리는 간이 테이블을 들고 거실 앞 텔레비전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간 즘에 기다란 거실 테이블이 있었지만 불편해서 그 앞쪽에 간이 테이블을 두고 맥주를 마셨다.
"학교에서 뭘 했어?" 팝콘이 물었다.
"지루한 수업을 듣고 도서관을 갔지 가는 도중에 검은 옷 교수를 만나고 별일 없었어"
"검은 옷 교수?"
"응. 검은 옷을 즐겨 입는 교수. 검은 옷만 입는 교수일지는 모르겠지만"
"도서관에 가서는 뭘 했어?"
"그냥 앉아 있었어. 처음에는 아무 책이나 읽고 싶어서 갔는데 도착하니까 그럴 마음이 사라져서 나무 탁자 밑에 있는 나무의자를 꺼내고 앉아서 엎드리고 있었어. 그러고 시간 맞춰서 네 집에 온 거야"
"재미없어 보이는 하루였네" 하고 팝콘이 말했다.
"너는 뭘 했는데?" 내가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딱히 없어. 맥주나 마셔" 하고 말하더니 팝콘이 리모컨을 찾아서 텔레비전 전원을 켰다. 채널에서는 햄버거 광고가 나왔다.
"저거 보니까 햄버거 먹고 싶다." 내가 말했다.
팝콘은 ‘먹으면 되지 일어나 먹으러 가게’ 하고 말하더니 방으로 들어가서는 지갑을 가져왔다. 그러고 나서 내 팔을 붙잡더니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그런데 지금 시간에 문 열은 패스트푸드점이 있나? 없을 거 같은데" 내가 물었다.
"몰라, 가보면 알겠지."
우리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악어가 깨물어도 절대 깨지지 않을 개구리 알 같은 둥근달이 떠있고 골목 편의점 앞에서는 취객이 맥주캔을 손에 쥔 채로 앉아서 돈을 못 번다느니 내놓으라느니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편의점을 제외한 주변 가게는 불이 거의 다 꺼져있었다. 그런데 불 꺼진 테니스용품 가게의 유리창 너머로 스포츠용 유니폼이 파스텔 톤으로 빛나고 있어서 왜 그런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텔레비전을 켜두고 문을 닫아서 그것에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던 거였다. 밤의 골목은 마치 세상의 끝에서 대량의 사람들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번화가로 나오자 불 켜진 간판이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가게 앞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시간은 아홉 시 삼십칠 분을 넘어가서 나는 팝콘에게 없을 것 같다며 그냥 저기에 보이는 빵 가게에서 식빵이나 사들고 가자고 했다. 그는 "그래, 내가 사 올게." 하며 가게에 들어가 식빵을 사 왔다. 나는 그 식빵을 낚아챈 뒤 말했다.
"내가 사러 가려고 했는데"
"원래 이런 건 빠른 사람이 사 오는 거야." 팝콘이 말했다.
"그런데 오늘 아르바이트 안 가도 되는 거야?" 내가 물었다.
"이제 안 가도 돼. 그만뒀거든 사장이 이곳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자기 두 딸 대학교 등록금을 모두 뒷바라지했다고 말하면서 나한테는 약속된 아르바이트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가보라고 하는 걸 보고 관뒀어."
"일찍 가보라고 하면 좋은 거 아니야?"
"전혀. 시간제로 하니까 그만큼 시급을 못 받잖아. 한가할 때마다 먼저 가라고 하면 나는 그만큼 손해를 보는 걸? 구두쇠 사장! 관두길 잘한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팝콘은 티브이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렸다.
"식빵은 내가 사줬으니까 그걸로 뭐든 만들어 보라고 부엌에 가서 냉장고도 열어보고" 팝콘이 말했다.
나는 ‘그래, 좋아. 기대해 봐’라며 말한 뒤 냉장고를 열어서 넣을 재료가 있나 뒤적거렸다. 냉장고에서 버터와 오이. 부엌에서는 양파와 스팸을 발견한 뒤에 가스레인지 불을 켠 다음 프라이팬을 달구다가 버터를 잘라 넣었다. 버터가 녹아내리자 나는 식빵을 넣어 앞뒤로 노릇하게 구웠다. 식빵이 구워질 동안 양파와 오이를 얇게 썰고 다 구워진 식빵을 접시에 올려둔 다음 스팸을 얇게 잘라서 마저 굽고 그것들을 포갠 다음에 케첩을 뿌려서 마무리했다.
다 만든 토스트를 접시에 담아 가져가자 팝콘은 한입 베어 물더니 ‘맛있어. 합격’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먹으면서 리모컨으로 티브이 채널을 돌렸다. 얼마 가지 않아 채널을 멈춰 인형 탈 아르바이트 인터뷰를 보고 있는데 팝콘이 토스트 마지막 조각을 먹으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인형탈을 쓰고 있겠지?"
"누구나 그렇겠지. 너도 나도 맥주도 햄버거도 감자칩도 전부다."
팝콘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리모컨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온 세상의 소리가 소멸된 듯이 조용했다. 남아있던 모든 소리가 가전제품에 빨려 든 것 같았다. 무음의 텔레비전에서 비치는 화면의 잔상이 주변에 반사됐다.
"너 그거 알아?" 팝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팝콘을 쳐다보았다."뭘 알아?"
"네 옆모습 되게 균형이 잘 맞는 옆모습이야."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미술가였다면 네 옆모습을 본뜬 틀에 석고를 붓고 석고상으로 만들 거야." "고마워." 암전처럼 침묵이 이어졌다. 칼로 벤 것처럼 전환된 분위기였다.
나는 팝콘의 옆으로 가서 어깨에 기댔다. 고개를 들어 팝콘을 보자 그도 내려다보았다.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따금 생각해. 내가 그때 반대편에 있었다면 더 나았을까 하고." 그가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술을 마시면서 그런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그는 멋쩍게 웃어 보이며 마저 말했다.
"그럼 나는 언제 이런 말들을 해야 해?"
"글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소거가 된 티브이에서 나오는 다른 사람들의 입모양만 쫒고 있었다.
한참 생각하며 있던 나는 천천히 입을 떼며 말했다.
“미안해”
팝콘이 안아주며 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얼마간 흐느끼며 울더니 시간이 흐르자 말했다.
"괜찮아. 유혁아. 괜찮아. 유혁아. 내가 더 미안해. 내가 더 미안해.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누구나."
나는 속으로 그의 말을 되뇌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