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B 카페에서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집 안 바닥에 주저앉아 구겨지듯 누웠다. 나는 천장에 있는 조명을 보며 어슴푸레한 안개를 떠올렸다.
어느새 창밖의 햇볕은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방 안의 아이보리색 벽지가 틀어지듯 탁하게 변하고 있었다.
어둠은 언제나 그렇듯 나를 깊숙이 끌고 가고 있었다. 숲 어딘가에서 허우적대는 꿈이 떠올랐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오지 않고 숲 속에서 붉은 눈의 무언가가 나를 주시하고 있는 꿈이었다. 지치기를 기다리는 듯이. 오래전 팝콘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누구나.] 그때의 그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일까. 나에게? 아니면 동생에게? 그것도 아니면... 멍하니 있노라니 이대로 잠이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움직이기도 싫고 아무것도 하기도 싫고 정말이지 아침부터 찾아와서는 귀찮게만 하고 팝콘은 자기 여자친구를 나한테 맡기듯이 행동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하지만 가까운 친구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왜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린 도마처럼 기분이 좋은 거지?’
나는 방바닥에서 일어나 부엌 전등을 켜고 냉장고를 열어 삼 일 전에 사두었던 오이를 꺼내 씻었다. 그런 다음에 식칼로 꼭지와 아랫부분을 처리하고 나서 반으로 잘라 사등분으로 나누어 만든 오이 스틱을 접시에 담고 거실로 가져와서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그건 무더운 여름 그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나는 오이를 두 개째 집어먹고 입안에 있는 오이를 아삭아삭 씹으며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서 거실로 재빠르게 나갔는데 방 쪽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방으로 향했다. 방 한편에 쌓아두었던 책더미가 무너져 있었다. 나오면서 발에 차이는 느낌을 받았는데 책더미를 건들었나 보다. 나는 무너져 내린 책을 하나씩 쌓아 올렸다. 정리하는 도중에 바닥에 난잡하게 쌓아둔 책 더미 속에서 대학생 때 사두었던 어린 왕자가 눈에 띄어 꺼냈다. 몇 년 된 것치고는 책표지도 책 측면도 깨끗했다. 책을 손에 쥐고 펄럭거리자 접힌 종이가 떨어져 나갔다.
열어보니 대학생 때 쓴 메모였다. ‘별 걸 다 적었네’
나는 어린 왕자 책과 메모를 들고 거실로 나와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고 나서 남은 오이 스틱을 하나 더 입에 넣고 책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종이를 펴서 읽기 시작했다. 반쯤 먹은 오이 스틱을 접시에 내려두고 리모컨을 들어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가 집중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읽다 보니 그때의 기억이 폭포수처럼 품어져 나왔다.
/ 오전 기차 안. 가을.
나는 지금 기차 안에서 가방에서 꺼낸 연습장에 글을 쓰고 있어. 그리고 집으로 가고 있지. 어제 기차를 타고 대학교 엠티를 왔어. 장소는 대성리 역. 서울역에서 출발했고 선배와 동기 몇 명과 함께 어울려서 왔어. 거의 처음으로(어떻게 보면 혼자) 먼 곳을 기차를 이용해서 가야 하니까. 불안했는데 다행히 시간에 맞춰서 왔어.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내내 가기 싫었지만 어쩌겠어. 이것도 하나의 수업태도로 학점으로 들어간다는데 안 갈 수도 없잖아.
어렵게 도착한 것치고는 기분이 정말 최악이야. 아침 기차를 타고 집에 혼자서 가고 있어. 재미가 하나도 없어서. 밤새 놀아서 자고 있는 동기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작정 펜션에서 역까지 걸어서 와버린 거야. 거의 이십오 분은 걸어온듯해. 기차 안 풍경은 정말이지 모든 기분이 풀릴 만큼 멋지고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지만 나는 가슴속에 괴로움이 가득해. 나는 정말 어딘가 결여된 애일 거야.
지독하게 결여돼 있어. 아무도 구제해주지 못할 만큼 말이야. 밤새 잠을 자지 못했어 익숙한 곳이 아니면 잠을 못 자는 성격인지. 습관인지. 모를 이유 때문에 한두 시간 눈만 붙였다가 일어났어. 어제 귀신의 집 체험을 하고 (거추장스러운 이름과는 달리 동기의 어이없는 놀램에 헛웃음으로 끝난 이벤트였지만)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고 늦어버린 교수가 사 온 조개를 구울 동안에도 (물론 나는 해산물을 전혀 못 먹기 때문에 입에 대진 않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융합될 수 없었어. 멍하니 앉아 그들이 웃는 모습만 덩그러니 보고 있었어. 나는 왜 이곳에 앉아 있는 걸까.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나도 재미없는데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그 생각이 반복되니까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어. 그래서 아침 일찍 바들바들 떨면서 역전에 앉아 기차를 기다려서 타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집으로 향하고 있어. 아까부터 졸음이 쏟아져도 잠을 못 자고 있어. 혹여나 졸아서 내려야 하는 곳에 못 내릴 까봐. 정말 재미없고 멋없는 인생이야. /
나는 잘린 종이에 쓰인 메모를 조심스럽게 접고 다시 책에 끼어두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와서는 캔 뚜껑을 따고 마셨다. 잘라두었던 오이가 떨어져서 서랍을 열어 초콜릿을 꺼냈다. 리모컨을 들어 음소거를 취소시키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를 크게 키웠다. 정적은 더 이상 싫었다. 누구라도,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귓속을 커다란 소리로 틀어막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게 오는 것은 어두워진 밤을 헤집고 나오는 과거의 잔상이었다. 나는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고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봤다. 밖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낮에 한두 번 보던 길고양이 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낮 카페에서 들었던 분홍 돌고래 가게를 떠올렸다. 꽤 괜찮은 가게명이라고 주인아저씨. 나도 돌고래 좋아하거든요. 나는 자세를 바꾸고 손에 든 캔맥주를 마셨다. 입안에 남아있는 초콜릿과 섞여 기묘한 맛이 났다.
그때의 나는 혼자서 서울역에 도착한 뒤 많은 사람들 틈을 지나 곧장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누워 몇 시간이고 잠만 잤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시계를 보고 다시 잠들고 주말을 보내고 학교를 가고 별것 없었던 그날들. 정말 재미없는 시간이었지. 나는 다 마신 캔맥주를 옆에 놔두고 나서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밖으로 나가 집 앞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한두 명 정도 되는 사람이 벤치에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었고 흰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도 보였다.
나는 그 흰 강아지를 보고 달려가서 주인에게 만져봐도 되냐고 물었다. 주인은 만져봐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주저앉아서 오른손은 턱을 왼손은 미간을 만져주었다. 흰 강아지는 혀로 내 손을 핥았다. 올빼미 깃털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순하디 순한 강아지였다. 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자 흰 강아지도 알아들었는지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편의점으로 가 500ml 생수를 산 뒤에 꽤 오랫동안 끊지 않고 마셨다. 물은 절반가량 줄어들었다. 남은 생수를 들고 집에 가려는데 뒤에서 ‘어이, 어이’하고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들어 나는 뒤돌아서 확인했다. 그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도로를 걸어가며 친구에게 장난을 치면서 내는 별것 아닌 소리였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 생수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방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