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by 시기화

이튿날 팝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나는 헌책방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마트에서 사두었던 버섯을 부엌에서 볶고 있어서 진동이 울리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기름을 두르고 손으로 찢은 느타리버섯을 볶다가 소금을 쳐서 간을 한 뒤 접시에 옮겨서 식탁에 올려두고 구석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하자 알 수 있었다. 나는 팝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쯤 통화연결음이 울리자 이윽고 팝콘이 받았다.

"어. 전화가 곧 올 것 같았어. 너 이번 주 금요일에 뭐 해?"

"금요일? 오전에서 오후까지는 일 나머지는 아무것도 안 해"

"그럼 술 어때?"

"좋아. 어디서 마시게?"

"딱히 정한 곳은 없어 네가 원하는 곳 있어?" 팝콘이 말했다.

"나도 딱히 없어. 조용한 곳에 가서 심심한 얘기를 하고 헤어지고 싶은데 너는 이성을 만나고 싶겠지만"

"물론이지"

"너 루비에게 조금 더 잘해주지 그래? 그 애 너를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우리 일이야."하고 팝콘이 날카롭게 말했다.

"뭐, 그래. 너희 일이지. 조용한 곳 가자. 가게 안에 수족관은 있지만 물고기라고는 없을 곳으로"

"엉뚱하기는 그런 곳이라면 망해서 이미 사라졌을걸? 아무튼 금요일 아홉 시 십분 번화가 녹슨 곰 동상 앞에서 봐" 팝콘이 말했다.

나는 좋다고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버섯볶음을 먹고 흰쌀밥에 김을 얹어서 먹기도 했다.

저녁을 다 먹고 베란다 커튼을 친 뒤 비가 오는지 확인했다. 낮에 일하면서 라디오에서 들었던 일기예보가 생각난 탓이었다. 저녁부터 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아직 내리지 않았다. 팔 쪽에서 찬기가 느껴졌다. 곧 비가 내리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용했던 그릇을 바로 설거지하고 컵에 얼음을 담고 콜라를 부어 가지고 와서 책 더미 속에서 발견했던 어린 왕자를 읽었다. 어린 왕자가 장미꽃과 얘기하는 내용을 읽고 있을 때 창밖에서 빗방울 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을 덮고 겉면에 습기가 맺힌 컵을 들고 베란다 앞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상했다. 어두워서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가로등 불빛 사이로 희미하게 빗줄기가 보였다.

나는 그것을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콜라를 마시며 보고 있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방충망 사이로 한두 방울씩 들이쳤다. 나는 바지가 서서히 젖어도 팔뚝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얼음이 녹아버린 컵을 뒤쪽으로 밀어 두고 계속해서 빗줄기를 맞으며 켜져 있는 가로등만 주시할 뿐이었다. '가엾기도 하지 내가 너만큼 키가 컸더라면 네게 우산을 씌워줬을 거야.'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을 틀어 샤워를 했다. 욕실 안에는 수증기로 가득했다. 다 씻고 나오니 빗줄기도 어느 정도 약해져 있었다.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헌책방 카운터에 앉아 손님이 가져오는 책을 받아 들고 계산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오 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약간의 육체노동만 빼면 단순한 일이었다. 헌책을 등록해서 꽂아두거나 재고 책을 창고에서 옮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며칠째 내리는 비로 인해서 손님은 거의 오질 않았다. 비는 지독하게 내렸다. 새벽에도 저녁에도 온 세상이 잠겨질 만큼 내렸다. 나는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인터넷 주문서를 보고 주문된 책을 책장에서 찾아 가져와서 소포로 보내기 위해 제목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책을 봉투 안에 담아 밀봉을 하고 구석에 놔두었다. 라디오에서는 비 때문에 미끄러져 넘어진 사연이 흘러나왔다. 나는 혹시나 빗물이 들어갈까 봐 밀봉한 소포를 하나씩 다시 가져와서 테이프를 길게 뜯고 소포 안으로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에어캡 봉투 입구를 두세 겹으로 돌돌 말아주었다. 처리가 완료된 소포는 냇가에 던져두어도 한동안 물이 들어가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완료 한 물건에 라벨을 붙이고 있을 때 검은 모자를 쓰고 머리카락이 날개뼈까지 길게 늘어진 여성이 들어왔다. 나는 인사를 하고 라벨지를 마저 붙였다.

그녀는 투명우산을 우산꽂이에 꽂은 뒤 가게를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비 올 때 읽기 좋은 책 있나요?"

나는 하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다시 물었다. "비 올 때 읽기 좋은 책요?"

"네 적당히 길고 적당히 짧고 적당히 우울한 게인스보로 같은 느낌으로"

[게인스보로?] 처음 듣는 작가 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작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의 책은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이곳은 헌책방이잖아요. 마음에 드는 제목이나 표지를 보고 마음껏 펼쳐보고 마음껏 읽어봐요. 마음에 든다면 사면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덮으면 돼요."

그녀는 생긋 미소 짓고 책장 구석에 있는 색 바랜 책을 꺼내더니 펼쳐 읽었다. 그러고 나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꽂아두었다. 그녀는 베이지색 레인코트를 걸치고 블랙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비 오는 날에 블랙 하이힐이라니 꽤 멋지잖아.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며칠 전부터 어린 왕자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비 오는 날 방 안에 앉아서 읽기에 적당히 길고 적당히 짧고 적당히 우울한 것에 딱 적합해요."

"어린 왕자. 어릴 때 들어본 것 같아요. 사막 여우가 나오는 글귀가 유명하죠?"

"맞아요. 그렇지만 읽어보시면 다른 여러 가지 글귀들도 마음에 와닿으실 거예요. 저는 장미꽃이 어린 왕자에게 사과하는 장면을 좋아해요." 나는 그녀의 반대편 책장에 꽂힌 어린 왕자 책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어린 왕자 책은 초판본이 최고예요. 운 좋게 초판본이 남아 있네요." 그녀는 어린 왕자를 펼쳐서 훑어보더니 한 손에 들고 책장에서 [오후의 붉은 곰과 위태로운 떠돌이 개]를 가져와서는 같이 계산했다. 바깥에서는 굵어진 빗줄기 소리가 들렸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책이 젖을까 봐 걱정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걱정 마세요.라고 말한 뒤 두 권의 책을 에어캡 봉투에 담아 테이프를 길게 뜯어서 돌돌 말아 주었다. 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빗물은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까지 앞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가 가셔도 돼요."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나서 그녀는 의자에 앉아 가게를 둘러봤다. 라디오에서는 우울한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나는 라디오 소리를 줄이고 휴대폰을 들어 팝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세 번 통화연결음이 지나자"어." 하고 휴대폰 너머로 팝콘이 말했다.

"비가 꽤 오는데 오늘 약속 다음으로 미루는 건 어때?" 내가 물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비가 많이 와서 우리가 떠내려갈 수도 있으니까. 집에서 혼자 맥주나 마셔야겠네" 아쉽다는 듯 팝콘이 말했다.

"그냥 우리 집에서 마실래?" 내가 물었다.

"o.k" 팝콘이 말했다.

"그럼 그때 약속했던 시간에 우리 집으로 와" 짧은 대화를 하고 전화를 끊고 나는 라디오소리를 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빗소리가 잦아들자. 그녀는 '이제 가볼게요.'라고 말하더니 우산을 들고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이곳은 지하세계에 남겨져있는 동굴 같았다. 헌책방이 지하에 위치한 탓도 있지만 빗소리가 동굴 속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떠올리게 했다. '금방이라도 종유석과 석순이 생기겠는데' 나는 주변에 물이 떨어져 있는 우산꽂이. 그녀가 앉았던 의자.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헌책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자 이상하게 마음이 공허했다. 투명한 새가 가슴속을 뚫고 지나갔을 법한 공허함이었다. 구석에 처박혀서 아무도 모르게 잠들고 있을 헌책들을 보고 있자니 자취방으로 이사하기 전 짐 정리를 하다가 구석에서 발견한 작은 약통이 생각났다. 늦은 밤 침대 밑에서 약통을 발견해서 짐 정리를 멈추고 조심스럽게 열어봤는데 기억 속에서 잊힌 물건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면서 ‘이게 여기 있었네’하고 하나씩 빼서 보던 나. 그리고 발견되어 읽히는 것을 상실한 헌책들이 있는 이곳. 비슷한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라디오 소리를 다시 높이고 왼손으로 턱을 괴고 경청했다.


팝콘은 약속시간보다 십분 정도 늦었다. 그는 '미안 늦었지?' 하며 젖은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라면과 과자 그리고 캔맥주 다섯 개가 들어있었다. 나는 '괜찮아. 예전에 네가 한 시간 넘게 늦은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니야' 하고 말했다.

우리는 캔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틀어 놓았다. 이따금 끊기는 대화를 티브이 채널을 보고 보충할 수 있게 틀어둔 이유도 있었다.

과자를 집어먹으며 내가 말했다. "왜 하필 다섯 개의 캔맥주를 사 온 거야?" "짝수는 싫어서 세 개는 애매하고 네 개는 불길하고 그래서 고르다 보니까 다섯 개가 됐어." "그날 내가 가고 나서 너희들은 뭐 했어? 데이트 기분 좋게 즐겼으려나?" 그러자 팝콘은 캔맥주를 마시고 말했다.

"우리 헤어졌어. 루비한테 그만 만나자고 했어."

나는 말없이 캔맥주를 마셨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는 개그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방청객들이 웃고 있었다. 기묘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허무하네 그래도 셋이서 자주 만났는데"

"원래 헤어짐은 현실성 없게 이뤄지는 거거든" 하고 팝콘이 말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자 듣기에 거북했는지 팝콘이 맥주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길 잃은 사랑 얘기 말고 다른 거 없어?"

창밖에서는 비가 그쳤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름 모를 나무 밑에서 이름 모를 버섯을 딴 아저씨 얘기는?"

"해봐" 하면서 팝콘은 과자를 입에 넣었다.

"얼마 전에 카운터에서 멀뚱멀뚱 앉아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들어오더니 앞에서 눈치 보면서 서있는 거야. 그래서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하니까 머뭇거리더니 '혹시 버섯 잘 알아요?' 해서 '버섯요? 잘 모르죠.' 했지 쌓여있는 책 정리를 하고 다른 손님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갑자기 '내가 밖에서 버섯을 따왔는데 혹시 먹을 수 있나 해서.' 하고 말하더니 가방을 열어 지퍼백을 꺼내더라고 보니까 진짜 커다란 버섯이 여섯 개 넘게 들어있었어." 나는 목이 메어 물을 가져와서는 컵에 따라 마시고 마저 말했다.

"웃겨. 어디서 따온 건가? 그래서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됐는데?" 팝콘이 캔맥주 뚜껑을 비틀어 잡아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아저씨 이거 어디서 딴 거예요? 하니까 등산하다가 이름 모를 나무 밑에서 딴 거래. 그래서 이거 잘못 뜯어서 먹으면 큰일 나요. 독버섯일 수도 있잖아요. 하니까 아저씨가 생긋 웃으면서 '그래서 물어보려고 왔지. 책방에 있으면 혹시 알까 해서'라고 말하더라고 엄청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순간적으로 뭔가 거부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모른다고 하니까. 그냥 가셨어. 소리도 없이. 잠깐 뭔가를 하고 고개를 드니까 없더라고 그런데 나중에 버섯에 대한 백과사전이 어딘가에 있던 게 생각났어"

"재밌네"

"웃기긴 했어 뜬금없이 버섯 잘 알아요? 해서. 순간적으로 내가 생각한 버섯은 다른 버섯이었거든 너와 내가 가지고 있는"

"미친놈 웃기지도 않아." 하더니 팝콘이 손에 든 과자를 내게 던졌다.

"농담이야." 내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스피커 볼륨을 최대치로 올린 듯이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란다 쪽으로 가보니 방충망에는 이상한 나방이 몇 마리나 붙어 있었다. 나는 살충제를 가져와 방충망에 뿌렸다. 그러자 붙어있던 나방이 떨어져 나갔다. 방충망 사이로 약간의 빗방울이 들이쳤지만 베란다 문을 닫진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리네" 팝콘이 다 마신 맥주캔을 일렬로 두며 말했다.

"난 비 내리는 날이 좋아. 어릴 때부터 좋았어." 내가 말했다.

"나는 싫어. 비가 내리면 나를 잊지 말라는 듯이 어두운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거든 곰팡이처럼"

시간은 밤 열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 얘기를 하다가 섹스에 대해 얘기를 했다. 이내 다시 제자리를 찾아 대화를 나눴다.

"이런 날은 억지로 방안에 초를 켜놔야 안정이 돼 인형을 안고 자는 어린아이가 된 듯이" 팝콘이 우수에 찬 눈으로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팝콘은 얼마 안 있어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나 집에 갈 거야." 하고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 졌어" 하고 마저 말했다. 목소리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졌다.

"빗줄기가 잠잠해지면 가 지금 밖에 나간다면 모든 게 젖어버릴 거야. 양말도 가방도 머리카락도 그리고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 우산은 쓰나 마나야 바람까지 불어."

"비 맞고 집에 갈래. 그러고 싶어."

"어휴. 기다려봐.”

나는 부엌으로 가서 서랍을 열고 지퍼팩을 가져온 뒤에 팝콘 옆에 있는 지갑과 휴대폰을 넣고 공기를 빼서 눌러 닫고 건네주었다.

"자. 휴대폰과 지갑은 비를 피할 거야"

그는 지퍼백에 넣은 물건을 받아 들고 반으로 접어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그러고 나서 신발장 모서리에 걸려있는 검은색 우산을 챙기고 신발을 신고 나갔다.

나는 베란다로 가서 팝콘의 뒷모습이 희미해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텔레비전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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