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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Jan 20. 2024

인생 27개월 차, 이야기에 중독된 아이

아이가 영상보다 이야기를 더 찾는 이유

"아빠 이야기 해주세요"

"응 ~ 잠깐만~"


"아빠 상어 이야기 해주세요"

"응 ~ 잠깐만~"


"아빠 곰 이야기 해주세요"

"응 ~ 잠깐만~"


"아빠 한 번 더 이야기해 주세요"

"응 ~ 잠깐... 아! 하은아, 하은이가 이야기해 볼래?(아빠 목이 아파서...)"


요즘 우리 부녀의 대화는 거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이 난다.


하은이가 이토록 원하는 이야기 사랑은 두 달 전 즈음 우연히 시작되었다.

잠을 재우기 위해 하은이랑 침대에 둘이 누워 있는데, 홈구장이라 그런지 자신 있게 아빠를 밟고 다니며 온 침대를 누비고 있었다. 나도 너무 피곤했던지라 아이를 집중시킬 특단의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이야기를 해주면 어떨까'였다. 책을 부쩍 좋아하게 된 하은이가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는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하은아, 하은아 아빠가 이야기해 줄까?"

"네, 좋아요 아빠"


하지만 말을 해 놓고 나니 막상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오프닝 멘트는 확실히 알고 있다. 세계 만국 공통 오프닝 멘트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그렇다! 바로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생각해 봐도 최근 일은 아닌, 도저히 언제인지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래서 실제로 일어날 일도 아닌, 바로 '옛날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멘트를 빨리 생각해내야 했다. 겨우 입장한 첫 구독자를 놓칠 수는 없었다. 멘트가 뚝뚝 끊기면 집중도 끊겨 버리고 만다.


"어느 마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대~"


그렇다! 장소는 대충 어느 마을, 그리고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바로 '사람들(영어로는 people)'이다.

이제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무슨 그림...)


다음은 소재였다. 하은이가 좋아하던 책을 빨리 하나 떠올렸다.


"그 마을엔 거인 아저씨가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있었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화책 속에서 가져온 이야기를 지금 처음 선보이고 나면 앞으로 계속해야 할 텐데, 최대한 압축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장면이나 말, 행동들은 모두 생략했다. 아이를 과소평가 함이 아니라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을 더 많이 들려주고 싶었다.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아이의 반응을 관찰하며, 책의 내용을 카테고리화해서 주요 장면들을 뽑아내었다.

거인을 상대했던 세 명의 아저씨들을 나열해 아이가 웃을 수 있는 포인트를 만들어 주었다.


이야기가 어느새 중반으로 치닫자 얌전히 옆에 누워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하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야기를 슬슬 마무리해야 했다.


결국 거인과 마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맺으며 그렇게 초보아빠 키랭이의 첫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잠들기 전 한 곡 하는 달달콩이


(30분째...)


"아빠 또 해주세요~"

"(응, 그래 아빠가 목이 아프고 배도 고프고 힘들기도 한데, 그리고 잠은 또 왜 안 자니) 잠시만 아빠 목 좀 가다듬고~"

"네에~"


"옛날옛날에~ "


잠들어라고 시작한 이야기였는데 하은이가 잠이 깨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귀요미'의 요구를 아니 들어줄 수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이 하은이에게 제안했다.


"하은아~ 하은이가 이야기 한 번 해 줄 수 있어?"

"응, 내→가→, 한→번↘, 이↗야↗기↘, 해↗볼↗게→에↗~

옛날에. 거인이. 살았대. 그런데. 무서웠대. 그래서. 사람들이. 어~엄청. 무셔워서. 그랬대. 갑자기. 음...

음... 아빠가 해주라. 어렵다. 아빠가"


아이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잠이 확 달아났다. 수십 번을 들은 하은이가 이야기를 제법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몇 번 흉내 내 보던 하은이는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1시간 만이었다.





이제 나도 이야기꾼(?)이 되어 약간 '사짜' 냄새가 나지만 원하는 이야기를 술술 제조해 내고 있다. 포맷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아무 사람이나 사물을 갖다 붙여도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맛깔난 연기와 해피엔딩은 덤이다. '면접 준비할 때 다녔던 스피치 학원의 효과가 여기서 나타나는 것인가!'


이 참에 아내도 이야기 꾼으로 만들었다. 내 이야기를 많이 들어본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이야기... 한 3개 정도 만들어 놔요..." 그러자 뚝딱뚝딱 3개를 만들었고, 다음 날 바로 활용했다.


부작용도 있었다. 아이가 엄마가 했던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 아빠가 그건 잘 몰라서 아빠 이야기 해 줄게~"


"여보, 이야기 3개 저도 좀 알려줘요. 외울게요"




연신 아빠를 붙잡고 이야기를 해 달라는 아이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세 사람 모두 낮에 흩어져 있다가 저녁에 잠시 만나 아빠 엄마는 집안 일 하느라 바쁘고 아이는 혼자 노는 시간이 많이 생긴다. 내가 24시간 근무에 들어가면 하루는 엄마 혼자 아이를 봐야 한다.


최대한... 최대한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놀아주고, 더 많이 같이 있어 주고 싶지만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더 찢어 놓곤 한다.


아빠와 엄마가 만들어 낸 다소 유치고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려고 하는 아이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이제 이야기를 다 외웠을 법도 한데, 아빠와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서 그러나 보다 싶다.


영상을 보여줄 때는 '다시 보기'를 웬만해선 잘 안 하는데,

아빠 엄마의 이야기는 계속 '다시 듣기'를 하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아이에게 주는 사랑보다

아이가 주는 사랑이 더 크기에


나는 늘 부족함을 느낀다.


평생 아이에게 다 쏟아부어도

아이가 내게 준 사랑은

다 갚지도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바라는 것이 없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딱 하나... 딱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가 살아온 세상보다  네가 살아갈 세상이  그저 조금만 더 밝은 세상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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