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댁에 다녀온 그날은 올해 명절도 이제 곧 끝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명절 당일 당번 근무에 당첨되어 이번 스케줄은 밀려도 한참 밀려버렸다.
고향이 아니라 귀성길은 아니지만 나의 드라이빙 코스는 아버지댁에서 외가로 이어졌다가 귀가 시 다시 아버지댁을 지나오는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아버지와 인사를 하고 나서면 집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 동네를 한 번 더 지나면서 속으로 '뭐 하고 있을까~ 식사는 하셨나~'하면서 생각을 하게 되는 뭐 그런 상황이 생긴다. 오가는 차들이 즐비한 도로 위에 서 계실리 없으니 마을만 쳐다보다가 스윽 지나간다는 뜻이다.
그날도 '아버지는 뭐 하시나~' 생각하며 마을 진입을 앞두고 있었다. 마을 앞 도로가 시작되는 구간은 1차선 커브길이라 속도를 조금 늦춰야 한다. 습관처럼 이때다 싶어 엑셀에 무겁게 올려놓았던 발을 떼고 자연감속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앞선 차량의 후미등 쪽에서 비상등이 켜지는 것을 목격했다.
"어어!"
"왜 그래요?"
굵고 짧은 감탄사에 뒷좌석에 타고 있던 아내가 물었다.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있는 차 안에서 나는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단어 몇 개만 조합해서 입 밖으로 쏟아내었다.
"아! 그게, 앞에 아빠가, 아니 딸기가, 차가. 아빤데? 왜? 무슨. 딸기? 박스? "
랙이 걸린 컴퓨터마냥 버벅 대며 비교적으로 랙이 덜 걸린 손은 자연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아빠 뭐 하세요?"
마을주민일 뿐인 아버지는 수신호를 하며 홀로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아~ 어!(휘잉~)"
아마 더 이야기하려고 한 것 같지만 나는 교통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지나가며 상황을 파악했다.
"여보, 딸기상자들이 바닥에 쏟아진 것 같아. 차 돌려서 도와드리고 가자."
"그래요. 랭랭."
이제 막 잠이 든 하은이가 깰까 싶어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아무래도 혼자 서 있는 아버지를 두고 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트렁크에 늘 싣고 다니는 작업용 장갑하나를 꺼내 끼고 현장으로 가보니 비싸서 사 먹기도 망설여지는 딸기가 가을철 은행나무 열매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던 흰 스티로폼 상자 속 딸기들은 스티로폼과 뒤섞여 그야말로 설향(雪香)의 자태를 뽐내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고객의 한숨과 힘들게 수확한 자식 같은 딸기를 쏟아버린 농민의 눈물이 뒤섞인 설향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엄호(?)를 받으며 몇 통 해치우고 나니 이윽고 군청 기동대 어르신들과 경찰, 근처 식당 주인까지 가세했다.
경찰관 분들의 교통 통제와 현장의 일사불란한 삽질과 비질 덕에 도로는 금세 깔끔해지고 있었다. 몇 차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니 꼭 내가 군청 주무관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며 나는 현장을 벗어났다.
차 안은 자고 있어야 할 꼬마아이가 깨어있었다. 짙게 선팅 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은이의 입모양을 보니 "아빠, 아빠"라고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