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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랭이 Jul 03. 2024

내가 만난 상담사만 2천여 명

길 위에서 에세이를 쓰다

 "잘 봤나?"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단맛, 쓴맛, 짠맛 다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억누른 채 대답했다.

 "네... 답안지를 바꿔서 그냥 떨어졌어요..." 


 약 3개월 간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끊어내 버리고, 먹던 약도 끊고 준비했지만 한 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떨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하하 고생했다. 첫 시험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다음에 또 준비 잘하면 되지. 조심히 내려오너라"


  '다음... 정말 다음이 있을까... 다음에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이대로 정말 장수생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꽤 오랜만에 많은 인원을 채용했던 시험인데, 이번에 놓치면 과연 다시 한번 기회가 있을까...' 나의 이런 걱정 가득한 감정에도 의외로 아버지는 덤덤하게 아들을 응원했다. 사실 그 누구보다 속이 탔을 텐데, 크게 내색하지 않으시는 모습에 가슴은 더욱 찢어졌다. 




 일을 찾아 나섰다. 내년 시험 준비를 위해서는 총알이 절실히 필요했다. 3개월은 주먹구구식으로 버텼지만, 이제는 정말 장기전에 대비해야만 했다. 다가올 겨울을 이겨낼 재화를 마련하기 위해 낮에는 통신사 대리점 직원으로, 밤에는 대리기사로 변신했다. 공부는 잠시 내려놓기로 하고 말이다. 


 수개월간 공부만 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일을 시작하니 약간의 해방감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는 먼 미래를 지향하는 삶이 아닌, 어쩌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데 집중을 하니 짓누르던 불안이 조금은 종식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걷힌 것 같았던 먹구름이 시커멓게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호흡은 제멋대로 날뛰며 잠을 들지 못하게 했고, 불안한 미래의 나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마치 환상같이 어두운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곤 했다.

  

 악몽을 꾸는 횟수가 늘어났다. 새롭고 낯선 환경을 만나면 늘 악몽을 꾸곤 하는데, 이 시기는 무슨 수를 써도 호흡이 정비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대화를 하면 대화는 되지만 정작 혼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때론 이러한 증상들이 나의 신경을 긁어대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유일하게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어떤 특정한 일에 집중'하는 상태이거나, 호흡곤란도 잊은 채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화 중에도 몇 차례 숨을 몰아쉬기는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내가 호흡곤란을 잊을 수 있는 시간 중에 하나는 바로 꿈을 꾸는 것이었다.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닌, 깬 채로 나의 밝은 미래를 그려보는 그런 꿈 말이다. 허황될 수도 있고,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것저것 적어나가다 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유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나갔다. 계속 적어가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수록 나의 꿈은 더욱더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특히, 현재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 따위를 휴대폰이나 수첩에 적는 습관이 생겼는데,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 보면, '불안'을 벗어나기 위한 발악이었던 것 같다. 가령 '현재 통장에 얼마의 잔고가 있는데 다음 달 나갈 돈을 해결하려면 이번 달 얼마를 벌어야 하니, 대리운전을 몇 번을 더 뛰어야 하고, 공부할 시간이 많이 있지 않으니 영어단어 400개 중에 200개만 외운다던지' 하는 식으로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수첩에 적어나가니 '불안'이 꽤 진정되었다.

 



 무엇보다도 야간 일로 시작한 대리운전이 나의 모든 불안을 잠식시켰다. 처음 얼마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악몽에 시달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고객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셨나 보네요"

 "예? 아, 뭐 그냥 직원들하고... 마셨지요"


 대부분의 고객들은 처음 꺼낸 나의 오프닝멘트에 당황한다. 뻔하디 뻔한 멘트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팁 문화(?) 때문에 기사들은 한마디라도 더 걸어보려고 노력하던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사실 1,000원짜리 한 장이 아쉬운 상황이라 말을 걸기 시작하기는 했다. 처음에는 좀 우스꽝스럽게 시작했다.


 "어유~ 사장님 차 관리를 엄청 잘하셨네요. 번쩍번쩍하네요~"

 "예? 아~ (우선 기분 좋고), 차 뭐.. 차 관리 아예 안 합니더"


 (뻘쭘...)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H사의 풀튜닝된 쿠페 차량에 탑승해, "와 고객님, 차가 진짜 멋지네요. 이렇게 멋지게 튜닝된 차는 처음 타봅니다." 새벽 3시 즈음 PC방에서 게임을 마친 고객님이 차에 올라타며 응수했다. "아이고~ 뭐 별거 아닙니다. 차값만큼 들어갔나?", "와~ 이 기어봉 이것도 처음 보는 건데, 멋지네요.", "아 이거요. 이거 제가 특별히 주문한 (툭!)", "???" 빠져버린 기어봉을 조심스레 다시 끼우고 목적지까지 아무 말 없이 들어갔다. 과한 액션이 고객 차의 기어봉을 뽑게 만든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차가 멋있니, 차가 깔끔하니 하면서 고객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비위나 맞추는 그런 멘트만 던졌다. 그렇다고 무조건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만 뻘쭘하지, 일단 말을 꺼내면 거기에 한 마디 두 마디 더 살이 붙으면서 대화가 완성되곤 했다.


 왼쪽 귀로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무전을 듣고 쳐내며 오른쪽 귀로는 고객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초능력이 자리 잡을 때 즈음 드디어 고객과 '진심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진심 대화'는 특이했다. 고객의 말을 들어주는 비율보다 나의 이야기를 건네는 비율이 컸다. 고객들이 꽤 자주 나에 대해 물었기 때문이다.


 "기사님, 기사님은 젊어 보이는데 혹시... 낮에 다른 일 하세요?"


 그렇다. 젊은... 남자... 사람... 멀쩡한(?). 지금도 그렇겠지만 대리운전을 전업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사실 전업으로 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청년이 대리운전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과감 없이,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하곤 했다.


 "소방관이 되고 싶어서 고향에 내려왔는데, 첫 시험은 떨어지고 내년에 시험을 준비해야 해서... 용돈벌이 좀 하고 있습니다. 겨울 준비해야죠. 하하하"

 

 나의 대답은 늘 기운차고 밝았다. 하루의 스트레스와 무거운 짐들을 한 잔 술에 가득 채워 흘려보낸 고객을 상대로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화하기는 정말 싫었다. 5분, 10분, 혹은 30분, 아니면 그 이상. 나와 함께 가는 고객들은 웃으면서 보내드리고 싶었다.


 "아이고~ 참 멋지네. 그래도 공부하려면 밤에 일까지... 피곤하지 않소?"

 "아! 아닙니다. 집에는 이제 다 커서 손 벌리기도 죄송하고, 이렇게 일하면서 또 좋은 에너지 많이 받아가니까,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되는걸요! 좋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객과의 대화가 업무의 하나로 느껴졌는데, 늘 새벽 퇴근길에 이 대화들이 곱씹어졌었다. 어두운 밤길을 털레털레 혼자 걸으며 2시간 전에 만났던 고객이 내게 해준 말, 조언, 격려들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밤 10시에 만난 고객이 해 준 뜨거운 격의 말씀이 밤 12시에 만난 진상고객의 욕설을 이겨내게 했다. 


 비슷하게 이어지는 마치 레퍼토리 같은 나의 이야기는 점점 형식을 갖추게 되었고, 이것은 마치 하나의 짧은 스토리텔링이 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지금 불안한데, 나는 지금 불행한데, 밝은 미래를 꿈꾸며 힘차게 나아가는 청년의 스토리가 점점 나를 덮어나갔고 마음의 병은 점차 치유되어 갔다. 낮 시간대에 호흡곤란 증상도 꽤 완화되어 갔다. 수면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많이 개선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아주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신체화 증상은 계속되어도 마음만큼은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낯선 이의 공간에서
펜 없이 써 내려간 나의 에세이는
 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거리 위에서 약 2,000여 명의 상담사들(?)과 만나며 분리되었던 과거의 상처받은 나의 손을 힘차게 붙잡았다. 지우고 싶었던 과거를 복원하고, 현재만 생각했다. 밝은 미래를 위한 현재 필요한 것들만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 손은 나의 1일 상담사인 '고객님들'이 잡아 주었다. 한 분 한 분의 따뜻한 관심과 말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내었다. 열심히 일한 후 한 잘 술을 걸치며, 아내와 자녀와 통화하는 그 모습들. 그 평범한 일상을 늘 지켜보며 평범한 미래를 꿈꾸는 나의 마음에 뜨겁게 불을 지폈다.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아이스크림 사갈까?"

 "애들은 자?"

 "아이고~ 잘 들어가셨습니까. 예예~ 덕분에요. 내일 뵙겠습니다"


 미래의 나의 가족이 거주할 작은 집, 큰 고장 없이 잘 굴러가는 평범한 차, 얼마가 되었든 매달 월급이 나오는 직장(혹은 사업장), 가족들과 잠시 어울릴 수 있는 시간. 이것이 내가 꿈꾸는 멀지만 평범하고 소중한 미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현가능한 목표'였다.


 그 어떤 이의 삶도 100%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다. 상처와 흉터가 없는 삶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누구든 다칠 수 있고 누구든 넘어질 수 있다. SNS 속 화려한 사진 속 주인공도 언젠가는 넘어진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긴 시간 동안 받은 상처와 사고로 인해 불안을 넘어 불안장애라는 타이틀을 달아버렸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게도 빛이 들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바라봐 주고 지지하는 분들이 있었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내가 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성공했지만 실패했다고 느끼면 실패한 것이다. 남이 보았을 때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내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성공한 것이다. 길 위의 수많은 고객들과 기사들을 만나며, 점차 이러한 생각들이 강하게 자리 잡았고, 가치관도 확실히 자리 잡아갔다. 수억 원짜리 차를 타면서도 마음이 좁은 분이 있고, 100만 원짜리 차를 타면서도 마음이 넓은 분이 있었다. 빚이 몇 억이 있어도 늘 웃으면서 고객을 모시는 기사님이 있었고, 팁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고객을 ATM기처럼 이용하다가 늘 지적을 당해 회사를 옮겨 다니는 기사님도 있었다. 


  Most folks are about as happy as they make up their minds to be.
(대부분의 사람들 행복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려있다.)
- Abraham Lincoln -


 큰 욕심을 거두고, 이룰 수 있는 것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자. 그리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자. 아픈 나의 과거도 망가진 나의 모습도 감싸주고 사랑하다. 나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다.


 나의 어둠이 당신의 빛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어둠을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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